내가 1987년 1월 초 동경에 상주하면서 한국에 자주 들리는 한 외신기자에게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해서 브리핑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서울의 한 호텔에서 저녁자리를 같이 하게 됐다. 비즈니스 코리아 발행인 겸 편집인 시절이었으며 동경에 상주하는 그 특파원은 로이터 통신 특파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약 2시간 정도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에 대해서 나의 견해를 얘기해주고 막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외국인 친구가 맥주 한잔만 더 하러 가자는 것이다. 날씨도 비가 와 술 한잔 생각이 나서 가까운 생맥주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그 친구가 말하기를 "PR업에 손대보라. 일본은 PR산업이 크게 발전해있지 않으나 미국을 보면 앞으로 동양에서 크게 잠재력이 있는 것이 PR산업이다. 당신은 정부측에서 친한 사람도 많고, 경제계에도 친한 사람이 많고 또 동료 기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PR분야를 개척하기에 한국에서 최적의 인물이다." 느닷없이 속사포처럼 던지는 말이기에 밤중에 홍두깨로 한방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그 친구의 미국 PR산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뒤따랐고 세계적인 주요 PR회사는 어떤 것이 있으며 당시 한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힐앤놀튼에 대해서 설명해주면서 현재 큰 광고대행사 중의 하나와 업무 제휴를 맺고 있으나 새로운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동경에서 들었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사실 나는 그때 힐앤놀튼의 이름을 처음 들었으며 PR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몇 개의 다른 채널을 통해서 PR산업의 현황에 대해 자료도 수집하고 국제적인 동향도 파악하게 됐으며 아직은 시기적으로 완전히 성숙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에 선구자가 되어 이쪽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투자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7년 여름 홍콩의 힐앤놀튼 아시아 태평양 지역 사장과 시간 약속을 하고서 홍콩을 방면했다.
사실 PR경험은 전혀 없이 단순한 언론계 경험과 어느 정도 완전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그들과 잘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능력만 갖고서 호랑이 굴에 뛰어든 것이다. 약 세 시간 수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솔직히 PR에 대한 깊은 지식이 전혀 없었고 실무 경험도 없었기에 그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 하나 한 것이 없었다. 다만 솔직하게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으나 언론계, 정부 및 경제계에 폭넓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 주고 국제적으로 비지니스 하는 관행은 철저히 이해하고 있으니 앞으로 잠재력을 인정해서 힐앤놀튼과 업무 제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얘기했다. 묵묵히 듣고만 있어 그들이 그 세 시간의 만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격식을 갖춰서 외교적으로 곧 자기들의 입장을 정리해서 연락하겠다는 말만 듣고 힐앤놀튼 홍콩 사무실을 떠났다. 초조하게 그들의 답신을 기다렸다.
약 2주일이 되는 어느 날 국제 전화가 걸려왔다. 잠재력을 인정해서 당신 회사와 업무 제휴를 할 테니 최선을 다해 일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날부터 12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힐앤놀튼의 한국 내 독점 업무 제휴사로서 수많은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그들과 일하는 동안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고 서서히 PR전문가로서 자리를 잡게 됐다.
그간 국내에서 수많은 외부 강의 요청을 받고서 언론계의 산 경험을 곁들여 PR실무를 얘기하면 가장 도움이 되는 강사로 자리를 잡게 됐고 외국의 PR지침을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하기도 했으며, 특히 위기관리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깊이 있는 발표도 하여 우리 기업들이 21세기 위기 관리에 철저히 대비할 수 있게 방향을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제2대, 제3대 한국PR협회 회장직을 맡았을 때는 한국 최초의 PR교실도 만들어 업계와 학계가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장도 마련하게 된 것을 지금도 큰 보람으로 알고 있으며, PR일을 하면서 느낀 진한 경험들을 후진들을 위해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면 1987년 초 한 외국인 친구와의 짧은 대화가 나의 인생 진로를 크게 바꾸어 놓은 셈이다. 매 순간마다 진지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국 협회의 APR인증에 도전
나이 오십이 넘으면 욕심을 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PR업계에 몸 담으면서 꼭 하나 욕심 나는 것이 있었으니 미국PR협회(Public Relations Society of America ; PRSA)의 APR(Accredited in Public Relations)인증서이었다.
오랜 기간 동안 미국PR협회의 회원으로 PR 관련 자료를 받아오면서 한국 PR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미국PR협회의 전문성을 배워야 하며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APR 인증을 획득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험이 하루종일 치러지며 문제의 수준도 아주 높아 영어로 완벽하게 다 답해야 합격한다고 하니 겁부터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강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또 세계 최대의 PR대행사인 힐 앤 놀턴의 전문가들과 10년 이상 같이 일했으니 나 같은 사람이 합격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합격한단 말인가 하고 자만심을 갖고 첫 시험에 대비하였다.
1997년 3월 뉴욕에서의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약 2개월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험 준비에 꼭 필요한 "Accreditation Sourcebook"과 "PRSA Accreditation Study Guide" 책 두 권을 구입은 해놓았으나 자만심으로 차 있었고 또 회사 내적으로 경쟁 프리젠테이션이 많아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하고 미국에 갔다. 필기 시험 하루 전날에 APR 인증을 취득한 3명의 미국인 심사위원이 약 두 시간 동안 구두 시험을 실시했다. PR의 다양한 케이스를 얘기하면서 관련 질문을 했고 단답형 질문과 PR 현장에서 느낀 다양한 경험담을 털어놓게 유도하였다.
두 시간 동안의 구두시험은 자신 있게 치르고, 오랜만에 미국에 있는 처형과 처남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같이 온 집사람에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다양한 필기 시험을 치렀다. 앞에서 언급한 두 권의 책을 샅샅이 훑어 보지 않고서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상당히 많이 출제되었고, 특히 윤리와 관련된 문제는 전체 필기 시험 문제의 약 30%를 차지하였다고 기억된다. 이처럼 PR이 하나의 산업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강조되며 전문성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윤리적인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3월에 시험을 치르고 7월 중순에 시험 결과가 도착하는데, APR 인증을 얻게 되면 집으로 결과를 통보하는 우편물의 이름 뒤에 APR이라는 표시가 있을 것이고 불합격하면 APR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사전에 안내해주었기에 7월 중순부터 이름 뒤에 APR이 있기를 기원하면서 우편물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 한잔을 하고 늦게 귀가하였는데 아내가 PRSA에서 온 봉투 하나를 내미는데 거기에는 Mr. Kim Kyong-Hae 뒤에 APR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사무 착오일 것이라 생각하고 봉투를 열어보고는 합격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참 흥분된 마음을 가누지 못하다가 공부하지 않고 자만심으로 가득찬 결과라고 생각하고 1년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단, 구두시험은 합격했으니 다음 시험에서는 필기 시험만 합격하면 된다는 내용도 편지에 잘 설명되어 있어 1년간 철저히 준비해야 겠다고 결심하였다.
1997년 8월부터 1998년 3월까지 약 6개월간 책 두 권을 거의 완벽하게 마스터하고 필기 시험중 오후 시간에 치르는 논문식 사례분석(Case Study)도 철저하게 준비한 후 시험을 치렀다. 1998년부터 시험을 치르기 위해 미국에 가지 않고 한국에서 치르게 되어 아주 편리했으며 시간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시험에서도 역시 윤리와 관련된 문제가 많이 다루어졌으며, 오후 시간에 치르는 PR사례 관련 응용 문제는 더욱 더 복합적이고 광범위하였다. 1998년 7월 드디어 한국에서 세번째로 APR 인증을 얻게 되었다. APR 인증을 획득한 그날 나이 50이 넘어서 새벽 2-3시까지 공부하면서 쌓인 모든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이 APR 인증으로 한국 PR 업계 발전에 더욱 더 크게 기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처음 미국에서 APR에 도전했을 때 옆에서 같이 시험 친 36살 된 미국인 친구는 컴퓨터 회사의 PR부서에서 근무하는데 APR 인증을 획득하면 회사에서 30%의 급료를 인상해준다고 해서 APR시험을 치르게 되었다고 아주 실용적인 배경을 얘기해 주었다.
현재 국내에서 PR업을 지망하거나, PR업에 종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APR 도전을 권유하고 싶다. 우리의 PR산업도 이제 하나의 전문 산업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는 이때 전문성과 윤리성이 제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APR 인증을 받는 젊은 인재들이 더욱 더 많이 나오게 되면 PR산업은 더욱 더 빨리 발전하게 되며 21세기의 최고 인기 있는 분야가 될 것이다. 21세기에는 APR 인증을 받은 젊은 인재가 상당히 우대 받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국내 대기업들이 자사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대의 목적인 방어적인 PR(defensive PR)관행에서 벗어나 광고업무는 외부 광고대행사에게 맡기듯이, 대기업이 자체적으로 PR업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외부 전문 PR대행사에게 용역을 주게 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지금현재 프로젝트 별로는 PR회사의 서비스를 받고 있다. 21세기는 전문가의 시대다. APR은 PR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상징하기에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영문경제지 '비지니스 코리아'
1983년 한국에 영문 경제지가 전무한 상황에서 최초의 월간 영문 경제잡지 비즈니스 코리아(Business Korea)를 창간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시절부터 영자신문 편집국장 일을 해온 것에 언론사 경험도 있기에 자신있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 많은 관련 인사들이 한국에서도 이제야말로 국제적 수준의 영문 전문 경제지가 탄생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경제 상황을 정확히 알릴 수 있는 영문 경제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사실 국내 상황을 전세계에 신속히 알리는 일은 국가홍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는 신속하고 정확한 국내외 뉴스를 전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번은 미국의 무역규제가 한창이던 그 시절 미국국제무역위원회(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ITC) 대표와의 인터뷰를 성사시켜 미국의 정확한 입장을 알리는 기사를 낸 적이 있다. 이는 곧 국내 주요 일간지에 기사화되었는데, 비즈니스 코리아에서 다루는 기사내용의 질과 그 신속성을 보여주는 예이다.
비즈니스 코리아의 또하나의 강점은 아무래도 최신의 광고마케팅이다. 외국 매체의 광고 세일즈를 대행하는 미디어 랩(Media Representative) 업체를 전 세계에 걸쳐 지정 계약한 것이다. 전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광고 덕분에 창간 후 3개월부터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 낙후를 면하지 못하던 한국 잡지업계에 하나의 “기적”이었다.
나의 광고 수주 전략은 “광고를 숫자로 팔았다” 데 있다. 비즈니스 코리아에 광고를 게재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는가를 아주 숫자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광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심도있는 독자층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개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국제전선 사장은 흔쾌히 1년 광고를 약속하기도 했다.“김 사장, 창간 1년간이 가장 어려우니 내가 힘이 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하세요.” 지금도 내 귓전을 울리는 그 음성은 힘이 들 때마다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도움들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회사에 침대를 하나 마련했다 오해를 받기도 했다. 집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야전사령관이 되지 않고서는 바쁘게 돌아가는 새로 시작한 사업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밤새워 영문기사 쓰고, 교정보고 하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이 좋아서, 너무나 좋아서가 아니라면 해낼 수 없었던 일들이다. 핏속에 흐르는 피보다 진한 인쇄잉크 때문에 내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아니 내가 기꺼이 받아들인 운명이었다. 난 일이 곧 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만난 잊지 못할 얼굴들이 있다. 현 CNN 손지애 지국장과 이병종 뉴스위크 특파원이다. 이 둘은 비즈니스 코리아의 창간 초창기에 가장 성실한 기자였다. 비즈니스 코리아 기사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이 두 사람은 결국 사내결혼을 했다. 지금은 뉴스위크 주한 특파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병종 씨는 한편으로는 숙명여대 겸임교수로 출강하면서 PR을 강의중인데 매사에 열심이다. 언론과 PR은 어쩔 수 없는 이웃사촌이다. 손지애 특파원은 당시 고등학교만 나왔어도 나이가 1살만 더 많으면 ‘언니’ 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주었다. “앞으로 큰 일을 할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었는데 CNN의 한국 지국장으로 일은 당차게 하면서도 늘 겸손한 그녀를 보면 기분이 좋다. 외국에 출장 가서 CNN을 틀면 한국 뉴스가 나올 때 “CNN 손지애 Seoul"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자랑스럽다. 요즘도 가끔 찾아와 옛날 얘기를 하면서 “아 옛날이여(good old days)"에 대해 읊조리곤 한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이들이라 허물없고 더욱이 힘이 된다. 손지애 국장은 최근에는 서울 외신기자클럽회장의 중책도 맡게 되어 그의 영역이 더욱 더 넓어지고 있다. 최근 손지애 국장은 외신기자 클럽 활동의 활성화 방안으로 기업이나 정부의 주요인사들을 초청하여 외신기자들에게 정보를 활발히 전해주는 장을 마련하고 있어 더욱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비즈니스 코리아와 함께 빼놓지 말고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다. 락스미 나까미 편집국장이다. 네팔인으로서 한국의 경제전문가보다 한국 경제의 흐름에 정통한 기자였던 그는 광고를 매개로 나를 방문하여 알게 된 네팔의 “천재” 언론인이다. 한국 경제의 흐름에 관해서라면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숫자가 다 들어있어 특급 정보를 기사로 쓰는데 특히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던 기자였다. 비즈니스 코리아의 기자 생활에서 쌓인 노하우를 오랜 기간 동안 세계 최고의 경제잡지 “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의 한국 특파원으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최근 아시아 위크(Asiaweek)의 주한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 역시 이화여대출신의 여기자와 사내결혼하여 행복한 한국식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다. 강한 자기 주장과 신념으로 한층 더 수준 높은 책을 만들어 보겠다고 불철주야 노력해준 그에게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는 현재 국내 비즈니스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피트 엥가디오. 그는 저널리즘의 명문대학인 미주리 대학교의 저널리즘 스쿨 출신으로 코리아 헤럴드에서 일하다 비즈니스 코리아로 옮겨서 탐사기사(investigative reporting)를 많이 썼다. 국방부의 무기도입과 관련된 오프센 프로그램( offset program)에 관해 탐사기사를 쓰다 보안사의 감시도 받고, 나도 편집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상당한 조사를 받았으나 미국인 기자에게 그 뒷이야기를 다 말해주지는 못했다. 기자로서 한국 보안사가 언론활동에 간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좋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즈니스 위크의 아시아 총괄담당 중견 언론인이 되어있는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연락해 맥주라도 한잔 하곤 한다. 힘들었지만 보람있었던 시절을 음미하면서.
‘김경해의 장학생이 아니면 외신기자 아니다’
‘김경해의 장학생이 아니면 외신기자 아니다.’ 이 말은 외신기자 사회에서 돌아다니던 얘기다. UPI, AFP, 로이타 통신, 이코노미스트(Economist), CNN, 뉴스위크(Newsweek), 아시아위크(Asiaweek),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등 상당수의 외신기자들이 모두 비즈니스 코리아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PR 일을 하면서 외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Communications Korea)는 외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단적인 예로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가 주관하는 행사는 항상 가장 많은 기자들로 북적대곤 하였다. 그 모두가 비즈니스 코리아를 발행하면서 얻은 큰 자산이었다. 또 그들로부터 얻은 생생한 정보는 PR비즈니스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곤 했다. 외국 클라이언트(client)들로부터 ‘김 사장을 만나면 항상 알찬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 모두가 비즈니스 코리아의 옛 동료들에게서 얻은 정보라는 것을 나는 꼭 밝히곤 한다.
나의 오랜 친구들은 가끔씩 사업 정보도 알려준다. 외신기자들은 어느 기업이 한국에 진출한다는 등 최신의 업계정보를 제일 먼저 접하기에 정보를 얻게 되면 그들 스스로 생각하는 ‘친정’에 알려줘서 사업상 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들이 한국 외신기자 사회의 주류로 훌륭한 언론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즈니스 코리아 창간의 보람을 새삼스레 느끼곤 한다. 지금 비즈니스 코리아는 박정환 사장이 양도하여 잘 운영하고 있으며, 나는 PR인으로서 길에 매진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즈코리아만을 운영하고 있다. 아무튼 옛 친구들은 손에 익은 악기나 오래된 포도주처럼 익숙하면서 한편으로 반갑고 흐믓하며 나름대로의 멋이 있어 난 그들과의 만남을 무엇보다도 즐긴다.
한국PR협회의 탄생과 PR교실
국내 PR산업의 신장은 대개 PR전문회사들이 선진 대형 PR회사와의 업무제휴를 통해 최신의 PR기법을 도입하여 PR의 업무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다, 몇몇 외국회사들은 직접 한국에 진출하여 활발한 PR서비스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이에 한국 PR의 발전을 도모하기 이한 전문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89년 한국PR협회가 설립되었다.
초대회장으로 현 나라기획 조해형 회장이 추대되었다. 탁월한 국제감각과 폭넓은 인간관계로 한국PR협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년 후 제2대 회장으로 선임된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PR교실이다. 이는 1991년 1월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PR 업계와 학계의 관련인사들이 모여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이다. 80-100여명 정도의 PR 관련 인사들이 서강대학교에 모여 늦은 저녁시간까지 PR강의를 듣고, PR에 대한 최근 이슈를 논의하며, 관련 정보나 견해를 주고받는 이 모임을 통해 PR인들끼리의 희로애락조차도 나눌 수 있어 좋다. 또 학계와 업계 인사들이 함께 참가하는 이 PR교실을 통해 학계는 업계의 생생한 얘기를, 업계는 학계의 깊이 있는 연구를 접할 수 있어 모범적인 산학협동의 한 예가 되고 있다.
초창기 PR교실의 제목과 강사들을 살펴보면 PR교실이 한국PR업계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때는 모두 배우겠다는 자세로 PR교실에 참여하였으며 발표 후에는 진지한 토론도 이루어졌다. 주로 대학 강의실이나 소강당을 이용하여 PR교실이 개최되었으며 모든 참석자들은 밤늦은 시간에 PR교실을 마치고 대학 캠퍼스를 나오면서 학창시설을 생각하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제2대 PR협회회장에 취임하면서 발족시킨 PR교실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PR인의 집을 열다
2002년 5월30일은 나 개인으로 볼 때 기억 할 만한 아주 의미 있는 날이다. 1987년 PR업에 뛰어 들어 15여년 만에 아담한 5층 사옥을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마련하여 ‘PR인의 집’으로 명명하였다.
지하 1층에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을 마련하여 PR인들이 언제라도 무료로 사용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최근 젊은 PR인들의 모임을 PR인의 집에서 개최하여 앞으로의 한국PR의 방향과 젊은 PR인들의 역할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PR인의 집‘을 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PR인의 집에서는 또 한국PR연구원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PR연구원은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의 부설 연구기관으로 주로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다. 위기관리 인증프로그램과 ‘PR사관학교’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 PR인들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는 강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생각이다.
2002년 가을 한국PR협회의 전임회장들과 임원들을 모시고 조촐한 ‘잔치’를 열었다. 참석자들은 “이제 우리업계도 자체 사옥을 하나 갖게 될 정도로 성장하게 되어 기쁘다”고 필자를 축하해주었고 이것이 출발이 되어 앞으로 우리 PR업계도 더 큰 성장을 하기를 바란다.
초창기 PR회사라고 문을 열었을 때 어느 신문에 기사하나 게재하게 하는데 얼마나 필요한지 경멸조로 문의를 받을 때와 지금은 PR회사의 기능이 전략적이고 기업의 경영에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기업들이 갖고 있는 것을 비교하면 정말 괄목할 만한 내․외적인 성장을 한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대기업들이 이제 PR도 아웃소싱을 하게 되면 우리 PR업계도 버젓이 자기 사옥을 갖고서 안정된 비즈니스를 할 때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회사에서 혼자 남아 뒤처리를 하고서 뒤늦게 문을 잠그고 정리하면서 PR인의 집을 우리 PR업계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산실로서 더욱 더 발전시켜야겠다고 다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