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PR현장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68건

  1. 2008년 03월 10일 정치인들도 MPR 기법을 도입하라! (16)
  2. 2008년 03월 10일 고객이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당 청구금액(hourly rate)"을 지불하게 만들자! (2)
  3. 2008년 03월 10일 아버지가 아들에게 던진 한마디
  4. 2008년 03월 10일 외신기자를 내 사람으로 만든 김우중 전 대우 그룹 회장
  5. 2008년 03월 10일 다 잃은 후 더 많은 것을 얻은 옛 삼호건설의 설립자 조봉구씨와의 워싱톤에서의 짧은 만남
  6. 2008년 03월 10일 호리에 행장 전격경질과 숨막히는 숨바꼭질
  7. 2008년 03월 06일 Kodak사의 성공적인 투자자 관련 PR(IR)
  8. 2008년 03월 06일 월트디즈니사의 미국역사 테마와의 한차례 전쟁
  9. 2008년 03월 06일 협회와 회원들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미국목재보존협회의 PR프로그램
  10. 2008년 03월 06일 브리티시 텔레콤의 전략적 PR (2)
  11. 2008년 03월 06일 엑슨의 알래스카 석유유출
  12. 2008년 03월 06일 NASA 챌린저호 참사는 "PR계의 비극"
  13. 2008년 03월 06일 존슨 앤 존슨의 타이레놀 사건
  14. 2008년 03월 06일 도미노 피자 "30분 넘으면 무료"
  15. 2008년 03월 06일 맥도날드의 햄버거 대학(Hamburger University)
  16. 2008년 03월 06일 힐 앤 놀튼의 사내직원 커뮤니케이션
  17. 2008년 03월 06일 어느 원로교수의 고백
  18. 2008년 03월 06일 선전기법의 경연장 대구시장 선거전
  19. 2008년 03월 06일 PR교실에서 만난 노 외교관
  20. 2008년 03월 06일 한국PR협회의 탄생과 PR교실
  21. 2008년 03월 06일 ‘김경해의 장학생이 아니면 외신기자 아니다’
  22. 2008년 03월 06일 “당신 간첩 아닙니까?”
  23. 2008년 03월 06일 평양 보통강 “려관”에서 만난 고 이범석 수석대표
  24. 2008년 03월 06일 평양 지하 이발소에서의 삼십 분
  25. 2008년 03월 06일 추측하지 마라
  26. 2008년 03월 06일 위기관리 매뉴얼은 21세기 생존전략
  27. 2008년 03월 06일 카타르시스(Catharsis)만 맛보지 마라
  28. 2008년 03월 06일 가상위기에 대비하라
  29. 2008년 03월 06일 사전대응이 최선의 길
  30. 2008년 03월 06일 예방접종을 하라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펼쳐보면 하루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접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서 나의 하루를 돌이켜 보더라도 실수로 혹은 예기치 않은 일로 위기를 겪게 된다. 표면으로 보이는 이유는 각기 다른 듯 하나, 내면의 문제를 파헤쳐 보면, 이는 바로 전략적 위기 커뮤니케이션 부재로 발생한다.




특히 이해관계가 각기 다른 국민들을 주요 공중으로 고려해야 하는 정당 및 정치인의 경우는 그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장기적이고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 가는 과정 속에서 매 순간 위기에 철저히 노출되어 있다. 또한, 한번의 위기로 국민들의 마음에서 멀어진 정당 및 정치인이 다시 기존의 명성 및 신뢰를 쌓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기를 사전 예방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위기관리 프로그램 교육에 대한 정당 및 정치인들의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지난 대선의 가장 큰 패인을 스스로도 홍보의 문제로 꼽고, 개혁적으로 '정치 PR 특강'을 추진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정치인들의 이 같은 위기관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지난 2003년 7월 9일, 정부 및 정치인 대상 최초의 위기관리 교육 프로그램으로 저자의 '정치인과 위기관리'의 특강을 개최하였다.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정치인과 정부 관료 그리고 PR에 관심 있는 학생 등 120여명이 자리를 가득 매웠다.




먼저, 저자는 정치인들은 이미지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 커뮤니케이션의 실수, 언론관계 속 위기, 국민의 불신 등의 위기상황에 놓여 있지만, 그 어떠한 경우라도 위기관리의 첩견으로 꼽히는 사전대응적(Proactive)인 준비자세를 갖추고, 평소 좋은 이미지를 심어둔다면 위협스럽게만 느껴지는 위기는 바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전략적 관리의 중요성은 지난 대선 기간 중 여러 차례 보여진 노무현 후보의 위기 정면 돌파의 모습이나 사스로 중국 전체가 비상사태까지로 발전하였을  때 한국의 LG전자가 위기관리 전략인 '중국 사랑 캠페인'을 도입 오히려 매출이 급증하는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게 된 사례를 통해 더욱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위기 발생 이후 책임자 문책으로 쉽게 위기를 종결 시켜 버리는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위기 불감증 문제는 바로 위기관리의 시스템 구축 필요성을 상기 시켰다. 따라서, 강의 중 위기관리 Process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듣게 되었다. 위기 상황들은 먼저 내부인사 및 외부 전문가와 언론인을 통해 진단을 통해 (Crisis Audit) 완화(Mitigation) 과정을 거쳐, 사전대응적이며 모든 가정 시나리오를 상정하여 이에 대한 전략 수립이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위기관리 매뉴얼(CMM)을 작성하고, 모의 훈련(Simulation) 을 통해 사전 대비하여 회복(Recovery) 과정을 거쳐 교훈(Lesson)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게이트 키퍼와 여론 조장의 역할로 지금까지도 큰 힘을 작용하는 언론 관계에서의 위기에 관한 토픽이 나오자 실무에서 직접 언론을 접하고 있는 정치인 및 정부 관료분들이 보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종에 목숨을 걸어야 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언론의 성격을 절실히 이해하였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은 반드시 언론 훈련(Media Training)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끝으로 '정치인의 위기관리 10계명' 이라는 타이틀로 '자신을 마케팅 하는 키워드를 개발해야 한다.'는 4번째 계명을 스스로 실천해 주신 김경해 사장의 얘기 중 특히 실무에서 바로 적용 할 수 있는 정치에 MPR 기법을 도입하여 정치 CEO 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특히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략적인 단어 선택을 통해 참신한 메시지를 쉽게 전달하여 정통한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계명에서는 여성흡연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 자유의 횃불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여권신장의 이미지를 흡연에 심을 수 있었던 에드워드 버네이드의 예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의 뛰어난 창의력과 전략적 언어구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끊임없는 여론 진단과 스스로의 브랜드와 이미지도를 측정하야 하여 홈페이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하나의 전문 분야를 자신의 브랜드화 시키는 동시에 TV 토론 철저히 준비하고 연습하여 주요 이미지 전략의 수단으로 미디어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1세기의 키워드인 신뢰,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계명에 보다 무게를 실어 강의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예시와 핵심을 집어주는 명쾌한 설명으로 위기관리 특강은 뜨거운 열기 속에서 2시간여 동안 진행되었다. 강의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그 순간에도 밖에서 일어나고 있을지 모를 끊임없는 위기들을 직접 관리해 가야 하는 정치인 및 정부 관료들인 만큼 강의가 직후 이어진 질문과 답변 시간에도 질문의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위기관리 전문가의 조언을 얻기 위한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먼저, 무엇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언론관계에서의 위기관리 관련 질문이 들어왔다. 언론기사에서 잘못된 인용보다 부수적인 내용을 제목으로 하거나 편집상 부정적인 내용을 제목으로 뽑는 경우의 위기관리 방안을 궁금했다. 저자는 예를 들어, 'We do not'이 아니라, 'Don't'를 사용하는 전략적인 단어 선택을 통해 언론과의 관계 설정하여 기자가 ‘not'를 놓칠 수 있는 여지를 처음부터 차단하여, 언론이 결정적인 부분에 대해 잘못 인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을 마련/ 관리하고, 기자들이 이러한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금 더 구체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한나라당이 처한 가장 큰 이미지 위기인 '늙은 당'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출마예상자 또한 나이 든 후보가 많은 현실을 직시할 때, '젊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공격을 당할 경우, 신체적 나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전략을 묻는 물음에 대해서 신체적 나이에 관계없이 젊은 메시지를 던져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즉, 신체적 나이를 극복하기위해 선거 캠페인이나 TV토론에서 젊은 이미지, 튀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전략을 활용하며 이는 특별한 메시지나 이벤트를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유권자와 후보자간 활용 가능 한 미디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현대에서 가장 좋은 미디어는 홈페이지이므로 유권자와 소통할 수 있도록 적극 활용을 제안하셨으며, 지역구의 오피니언 리더와 이메일, 문자메세지 등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채널을 마련하는 방법도 제안하였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249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08년 04월 08일 18시 44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김경해 사장님, CEO 블로그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에델만 코리아에서 근무하고있는 이중대라고 합니다. 앞으로 블로그를 통해 사장님의 많은 인사이트를 접할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 2008년 04월 10일 13시 41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중대씨, 우리 직원들로부터 이야기 많이 듣고 있습니다.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우리 PR계에 많은 업적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축하 감사합니다.
  2. 2008년 04월 09일 01시 29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장님 안녕하세요. 블로그 오픈 축하드립니다. 사용하고 계신 블로그 소프트웨어인 텍스트큐브 개발사인 태터앤컴퍼니 홍보팀의 이미나입니다. 처음 홍보를 시작할 때 사장님께서 저술하신 책들을 보며 공부했었습니다. 이렇게 블로고스피어에서 뵙게 되서 정말 기쁩니다. 자주 찾아 오겠습니다.
    • 2008년 04월 10일 13시 42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안녕하십니까. 직원들의 도움으로 시작은 했지만 아직도 배워가고 있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3. 2008년 04월 09일 04시 08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김경해 사장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신인섭 교수님 소개로 CK에서 인턴했던 서재민이라고 합니다.
    블로그 개설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2008년 04월 10일 13시 43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서재민씨, 감사합니다. 저희 회사 인턴이셨군요. 어디에서나 우리 직원들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4. 2008년 04월 09일 13시 47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장님께서 조아라 하시는 봄이 되었습니다. :) 어제 정원에서 꽃을 심고 계시더군요. 비즈니스 할 때의 샤프한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일상에서도 자주 뵙지만 블로고스피어에서 뵙는 사장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실지 기대가 되네요. 자주 놀러오겠습니다. 건강하세요.
    • 2008년 04월 10일 13시 44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5. 부산댁
    2008년 04월 09일 15시 18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장님..블로그 오픈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팬분들이 많으십니다..^^
    도움이 되는 글들 많이 읽고 몸에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들게 하는 장입니다..
    사장님..배려로 일본 워크샵도 잘 다녀왔습니다..
    짱님이 빠지셔서..조금은 서운했습니다..^^;;
    다음에는 전직원이 함께 할 수도 있었음 합니다...
    • 2008년 04월 10일 13시 45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건강하게 잘들 다녀왔으니 좋습니다. 더욱 힘내서 잘 해 봅시다.
  6. prholic
    2008년 04월 09일 18시 02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희도 힘든 블로그를 이렇게 오픈하시고, 좋은 글 올려주심 감사합니다. 다치시고는 한번인가, 밖에 회사에서 못뵈었어요. 종종 4층에 올라오셔서 격려의 말씀해주시고, 새까만 후배이자, 직원들 야단도 쳐주세요...
    그리고, 정말로 다음번 워크샵에는 함께 했으면 해요...
    • 2008년 04월 10일 13시 45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7. 2008년 04월 10일 14시 29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저는 에델만에서 근무하고 있는 황상현이라고 합니다.

    김경해 사장님 블로그 오픈 축하드립니다. '생생한 PR현장 이야기'는 제가 광고회사에서 PR회사로 넘어올 수 있는 계기가 된 소중한 책입니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저자 사인을 받으러 CK에 한번 찾아뵙으면 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 2008년 04월 10일 17시 25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에델만에서는 블로그들을 열심히 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황상현씨.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좋습니다.
  8. mark
    2008년 04월 11일 14시 43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장님의 인기와 PR에 대한 열기가 훌훌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제 블로그를 통해 어디서든지 사장님의 큰 생각을 볼 수 있으니 너무나 기쁩니다. 지금처럼 CK직원들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2008년 05월 08일 16시 27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장대리, 뒤늦게 댓글을 접하게 되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사장이 CK에 다시온 이후 장대리의 얼굴모습이 활짝 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직원들이 똘똘뭉쳐서 PR의 전문인이 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무척 아름답습니다. 계속 열심히 대화나누고 CK를 한국최고의 PR 전문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힘을 모아봅시다. 감사합니다.

PR회사의 주요간부들은 시간당 청구 금액 (hourly rate)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 당 청구 금액은 급료와 근무시간 근무일과 직급 등을 고려하여 금액을 정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나 이 금액은 상당히 주관적인 차원에서 결정이 된다.




저자는 시간당 청구 금액을 US$350으로 정해 두고 있다. 이 금액을 인정해 주는 몇몇 관대한 고객도 있지만 다른 고객들은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면서 깍아 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월 고정금액(retainer fee)을 받는 고객과 단순히 한두번 프로젝트로 하는 고객사이에도 시간당 청구금액을 달리 하는 것은 당연하기에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 그 청구 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 필자가 만난 한 나이 지긋한 미국인 컨설턴트는 시간 당 청구금액이 $50,000라고 하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천문학적인 시간 당 청구금액을 갖고 있는지 큰 호기심을 갖고 그를 만나게 되었다. 겉보이기에는 평범한 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한 한국기업의 인수․합병(M&A)과 관련된 업무를 돕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고 필자의 회사도 그 일에 관여하고 있었기에 그 미국인 컨설턴트의 방한 첫날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다.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고 서로 친밀한 분위기가 성숙했을 때 필자가 그 외국인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한시간에 50.000US달러를 청구한다고 하는데 고객이 그것을 인정해주는가?” “김사장, 즐거운 마음으로 그들이 시간당 50,000US달러를 지불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야 되는지 말로 표현 할 수 없소.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고 고객에게 10배, 20배되는 가치를 창출해주지 않으면 이런 딜(deal)은 불가능한 것이요.“




시간당 청구 금액은 가장 핵심 전략회의나 실제 상대방과의 가격협상에 참여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하며 그 나머지 미국에서 한국까지의 비행시간, 호텔에 머무는 시간, 왕복교통시간, 식사시간 등은 청구를 하는 시간에서 제외된다. 변호사 친구와 얘기를 한참 하다가 “지금부터 자네와 하는 대화시간은 청구된다”는 얘기를 들은 경험이 있는 분들은 변호사나 컨설턴트들의 청구시간에 대해 정확한 개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프로젝트가 다 끝난 후 그 노인은 실제 회의에 참석한 시간을 1주일 서울 체류 동안 10시간으로 청구했다고 한다. 10시간이면 500,000 달러를 청구한 것이다. 약 6억 이다. 10시간에 6억이라는 청구 금액을 받았을 때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면서 “이 날강도 같은 X"라고 욕이라도 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이다. 그러나 그 고객은 기꺼이 500,000달러에다 실경비(OOPs : Out of Project Expense, 호텔과 식대 및 항공료 등의 비용)를 영수증대로 정산해 주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 많은 금액을 지불하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즐거운 마음으로 지불 할 수 있단 말인가?

500,000$를 청구했으나 상대회사와의 가격 협상에 있어서 그 노인의 전문적인 자문에 힘입어 그 회사는  최소한 50억은 더 받게 되었다고 한다.

6억을 투자하여 50억을 벌게 해 주는 것이 컨설턴트의 세계인 것이다. 이 경우 이 노인의 시간 당 청구 금액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계산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정도의 기준은 있겠지만 이 노인은 적어도 나의 컨설팅의 가치는 1시간에 $50,000이라고 주장하고 고객이 그 것을 인정해 줄 때 성립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도 나이 98세(1990년)에도 시간당 청구금액이 1,000US달러였다고 하니 그노인의 두둑한 배짱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우리 PR인들도 시간당 청구 금액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또 고객이 그 금액을 인정해주게 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 고객이 기꺼이 시간당 청구 금액을 인정해 줄 때 고객과 PR회사간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 지고 PR회사는 고객을 위해 돈을 더 벌 수 있게  매진하게 될 것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247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RY
    2008년 04월 09일 16시 49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주말같은 수요일입니다. 투표하기에 딱!이라는 비오는 날씨인데, 해물파전 생각나는건 저만일까요?:)
    어제 CK정원손질에 비지땀을 흘리시는 사장님을 우연히 뵙고 인사드렸었던 김인턴입니다.
    CEO 블로그 오픈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 2008년 04월 10일 13시 46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고생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후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악의 축’에 비유하는 발언이 나오면서 한반도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군사전문가이면서 현재는 로비스트(lobbyist)로서 미국의 한 기업을 도와주고 있는 연세가 지긋한 미국인을 사업상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핵과 관련된 북한 상황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한 후 북한의 핵과 관련해서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중국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이 핵으로 무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으니 남한은 한반도의 핵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그 전문가는 분석하였다. 북한이 핵으로 무장하고 되면 일본이 핵으로 무장하고 일본이 핵으로 무장하게 되면 남한도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니 동북아가 핵지뢰밭이 될 것이 틀림없기에 중국은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전문가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시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악의 축’ 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 머릿속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 굉장히 뿌리깊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부시대통령이 여러정보 채널을 통해 김정일위원장에 대한 독자적인 평가를 갖고 있겠지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심어준 부분도 크게 작용하였다” 상당히 새로운 이야기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아버지 부시가 CIA국장과 부통령을 지낼 때 아들 부시는 잘 알려진 것 처럼 별로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 마약과 알콜과 관련된 스캔달이 있는 아들을 불러놓고 나무라는 흔한아버지를 쉽게 연상 할 수 있다. 몇 번이나 아들을 불러 놓고서 좀 착한 아들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아들과 같은 사람(김정일)이 되려고 하느냐?”고 다그쳤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여러 번의 충고에서 아들 부시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하면 악의 모델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어서 ‘악의 축’이라는 발언이 나오게 된 발단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었다.




저자도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이런 주입식 교훈을 들은 적이 있다. ‘호랑이나 사자의 입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입이다 호랑이나 사자는 직접 공격해서 물어대는 사람에게만 피해를 주지만 사람의 입은 한번 잘 못 말하게 되면 너무나 많은 주위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더욱이나 그 말하는 사람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을 때는 전 국민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고 이야기하면서 말 한마디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은 기억이 난다. 그 이후 저자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두 번 세 번 생각해서 신중하게 하면서 세상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 사심 없이 얘기해주는 체험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그 파장이 크다.




많은 사람들은 어릴 때 부모들이 들려준 교훈적인 이야기에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살고 있기에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그들이 평생 살면서 교훈으로 간직 할 만한 메시지를 개발하여 효과적으로 자식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부모역할을 잘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집안에 두 명의 대통령이 탄생한 명문가. 그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던진 많은 메시지가 그 아들까지도 미국의 대통령이 되게 만들었지만 아버지가 단순히 더 좋은 아들이 되라고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까지 발전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간의 역사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243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세계경제를 움직인다는 미국 맥그로 힐에서 발행하는 비즈니스.위크(Business Week)지에 한국 관련기사가 나오면 자주 김우중 대우그룹회장의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대우와 관련된 경우에는 당연히 나타나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경우도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형식의 인용문으로 김회장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국의 비즈니스계와 관련해서는 김우중 회장이 압도적인 비중으로 인용되거나 직접 기사로 다루어 져 대우그룹의 국제 신인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1983년 한국최초로 영문 경제지 비즈니스 코리아(Business Korea)를 발행을 시작하였을 때 그 모델이 비즈니스 위크였다. 그래서 잡지 제호도 비슷하게 지었다. 그때 한 네팔국적의 청년이 기자로 응모하였다. 우리말에 능통하고 경제에 대한 지식을 아주 폭넓게 갖춘 청년이었는데 그의 설명에 의하면 네팔에서 언론인 생활을 하다 정치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써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능력을 검증해 보기 위해 몇 가지 상황을 가상해서 영문기사를 한번 써 보라는 숙제를 내 주었다. 그 기사는 A+ 기사였다. 그래서 그를 채용하게 되었다. 그 기자는 락스미 나까미(Laxmi Nakarmi)였고 상당히 오래 같이 일 하면서 편집국장으로까지 승진하였다. 그때 락스미 편집국장은 비즈니스 위크의 스트링거(stringer)일도 겸하게 되었다. 비즈니스 코리아 업무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비즈니스 위크를 위해 종종 기사쓰는 것은 권할만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비즈니스 위크에서 제공해 주는 정보와 기사를 쓰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의 전문적인 견해가 비즈니스 코리아의 질을 높이는데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락스미씨는 취재를 위해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자주 만나게 되고 김회장은 락스미씨를 따뜻한 마음으로 돌봐 주었다. 비즈니스 위크는 기자들이 지켜야할 투철한 윤리 기준이 있었기에 그 범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서로 친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재벌총수와 인터뷰하게 되면 소위 “촌지”라고 해서 봉투하나 받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으나 외신기자들은 그들의 내부 윤리규정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락스미씨도 저자와의 대화에서 대우 김회장 비서실에서 건 낸 흰 봉투하나를 받았으나 그 안에 돈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4번씩이나 서로 주고 돌려보내고 해서 결국은 돌려보냈고 대우 비서실에서도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후 김회장은 돈이 아닌 따뜻한 인간적인 배려로 락스미씨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같다. 사실 외신기자들은 이 낯설고 물 설은 한국 땅에서 계속해서 좋은 기사를 써야한다는 부담을 안고 힘들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말 한마디만 따뜻하게 해줘도 고마운데 우리나라 최고 재벌 총수인 김회장 같은 분이 조금만 마음을 써줘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락스미씨는 비즈니스 코리아에서 사내 결혼을 하였다. 이대 정외과를 졸업한 여자기자와 결혼식을 힐튼호텔에서 거행하였다. 그때 김우중 회장이 직접 참석하기도 하여 그 친분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락스미씨의 얘기에 의하면 사람의 손이 안으로 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이슈에 대해 재벌 총수의 인용을 집어 넣어야 할 경우 다른 총수들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 었으니 가장 쉽게 접근하고 항상 협조적인 김우중회장의 얘기가 나 올 수밖에 없더라는 것이다.



 

광고도 아닌 객관성이 생명인 기사 속에 자주 김우중 회장의 이름이 나오고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 기사에서 김우중 회장을 대하게 되면 그것이 대우에 미치는 광고효과는 천문학적이다. 몇 번은 대우 김우중 회장을 표지의 인물로 정해서 커버스토리로 기사화 되기도하여 비즈니스 위크가 대우의 김우중회장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세계경영을 하는데 있어 세계적인 경제잡지의 지원을 받을 수 만 있다면 받아야 한다. 대우 김회장의 이런 발빠른 움직임을 이해한 비서실과 기획실의 간부들도 락스미씨와 자주 등산도 가고 그와 비공식적인 모임을 가져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외신기자들과 친해져 비윤리적이지 않는 범위에서 그들을 감동시켜 더욱더 많은 우호적인 기사가 나올수 있다면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홍콩에서 발간되는 파.이스턴.이코노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지의 심재훈 서울 지국장은 일본기업과 한국 기업의 외신기자 다루는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얘기하는 것을 저자가 직접 들었다. “일본기업은 외신기자들의 정보 요구에 융단 폭력을 하고 있으나 우리 기업들은 외신기자가 전화 걸기만 하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 있어서 접촉하는 줄  알고 사시나무 떨뜻이 떨고만 있다.”




외신기사들을 분명한 윤리기준을 갖고 있기에 좋은 기사를 써서 높이 평가받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때 그들을 가끔 따뜻이 대해주고, 기자회견시에도 그들을 위해 따로 사내에서 영어 잘하는 사람을 시켜 영문보도 자료를 준비한다든지 임원들이 구체적 상황을 영어로 설명하게 해주면 그들이 힘들게 한국 신문에 난 것을 번역하지 않아도 되고 또 영자신문에서 그대로 인용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들은 아주 고마워하게 된다. 이 지구촌 시대에 외신이 어떻게 보도하는지가 이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신의 보도는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김우중회장에 대한 평가는 각 개인에 따라 다르게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업인으로서 외신기자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하고 나선 것은 높이 평가 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록 대우뿐만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의 신뢰도를 높이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김회장은 미국 방문시도 비즈니스 위크나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의 고위 편집국간부들과 식사를 자주 하였다. 언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소에 투자해둬서 그들을 “동맹국”으로 만드는 (ally-building)작업이 중요하다. 어려울 때 S.O.S를 친다고 먹히지 않는 것이 언론계의 현실이다. 이 모든 언론대응법을 완전히 터득한 김우중 회장은 지금 현재 해외를 떠돌아 다니면서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가 지금 과거에 그 화려했던 시절을 비즈니스 위크의 과거 잡지를 훓어보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과 코멘트가 다 기사화 된 것을 보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아마 쓴 웃음을 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거기서 강력한 하나의 메시지를 얻을수 있다. “외신기자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하는 기업총수는 CEO의 자격이 없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242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PR현장 24시는 항상 긴장감이 고조된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PR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저자와 친하게 지내온 홍콩의 한 PR회사의 대표가 “삼호의 조봉구씨를 아느냐? 조봉구씨가 김대중 정부를 통해 과거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데 법적인 일과 대미관계는 미국에서 담당할텐데 한국의 언론에 그 실상을 알리는 일을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아파트붐 초기 방배동의 삼호 아파트를 지었고 중동진출을 하여 삼호의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다가 어느날 갑자기 소리없이 사라진 삼호건설의 창업자 조봉구씨! 1997년의 어느 봄날 아침, 시중에서는 조봉구씨가 사라진 것을 하나의 미스테리로 여기고 있었고 저자도 언론인으로서 의문투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참에 조봉구씨 사건을 접한다는 호기심반, 평소 저자의 회사에 꽤 많은 비즈니스를 연결시켜줬고 오랜 기간 사귄 친분 반으로 그의 부탁을 수락하고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봉구씨는 서울 강남에 부동산 개발붐이 한창이던 70년대 무렵, 부동산 업계에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테헤란로 주변의 역삼동, 도곡동, 방배동 일대에 수백만평의 땅을 소유하였고, 강남 일대는 물론, 제주도 땅까지 근 백만 평이나 소유하고 있어 한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로 뽑혔으며, 그가 살던 방배동 집은 국내 재산세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74년 건설업체 삼호를 설립하였으며, 강남 일대에 자신의 땅에 1천 세대 이상의 대규모 아파트를 지었다.




저자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여러 사정들을 밝힐 자료도 없을뿐더러 그런 의도도 없다. 다만 5공 군사정권 때 일이기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이제 때가 되었다고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문제를 ‘정의’(justice)차원에서 규명하고 조봉구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나선 사람은 미 국무성의 고위 공무원 제프 씨브라이트(Jeff Seabright)씨, 그는 조봉구씨의 딸 조영애씨의 남편이었다. 로스앤젤리스에 있는 씨브라이트씨의 법대 동창이 운영하는 대형 법률회사에서 LA카운티 수피리어 코트에 대림건설등을 상대로 20억 달러 상당의 재산 반환 청구에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을 요약하면 삼호 건설의 조봉구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을 하자마자 삼호는 부실기업 정리 대상에 올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1984년에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그의 동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죽은 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가슴에 묻어둔 할말을 하고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로스앤젤리스와 워싱톤의 한국 특파원들과의 기자회견에서 삼호가 부실기업이었다면 주거래 은행에서 부도를 내고 기업주를 구속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인데, 이런 절차도 밟지 않고 하루아침에 삼호를 타 기업에 넘긴 것은 위법이라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삼호가 합병한 것은 예정된 각본에 따른 것으로, 은행을 통해 삼호에 자금압박을 가한 뒤 강제로 위임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자는 월간조선의 한 탐사기자가 로스엔젤리스에서 조봉구씨를 만나 인터뷰하는 것을 주선하였다. 그 기자는 취재 후 아주 긴 원고를 작성하였으나 어찌된 사연인지 월간조선에 기사가 게재되지 않았다. 다시 시사저널의 기자를 접촉하여 저자회사의 부사장과 같이 로스엔젤리스의 조봉구씨를 인터뷰하였다. 그 결과 3페이지에 달하는 심층보도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1984년에 일어날 일들을 13년이 지난 시점에 문제제기는 언론의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로스엔젤리스에서 조봉구씨를 만난 두기자에 의하면 조봉구씨는 정말 어렵게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겨우 17평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주는 연금을 받아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정은 시사 저널과 로스앤젤레스 특파원들이  인터뷰한 내용으로 신문에 기사화 되면서 그의 억울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저자의 관심은 그 사건 자체보다는 조봉구씨의 기막힌 인생역정이 더 큰 관심사였다. 한국최고의 갑부였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서 미국 정부의 연금을 받으면서 17평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면 아마 자살을 생각 할 수도 있지 않았을 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생활하는 법을 잘 터득한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한국 기자들의 로스앤젤리스 방문 후 저자는 조봉구씨의 사위인 씨브라이트와 딸 조영애씨를 만나기 위해 워싱톤을 방문하였으며 그때 조봉구씨도 워싱턴으로 오게되어 조봉구씨를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모습이 변했고 그 기막힌 인생역정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 까하는 호기심으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차분히 과거 얘기도 하면서 긴박했던 1984년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 악에 북받친 사람이 아니고 편안한 마음으로 큰 용광로에 증오와 분노를 녹이면서 그 기막힌 사연을 남의 얘기처럼 얘기하였다. 그에 비하면 그의 사위인 씨브라이트씨는 정의(justice)는 살아있다고 강조하면서 장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조봉구씨는 처음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미국인 사위가 한 노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앞에 나서게 된 지금 저 노인의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R인이 과연 이런 일에도 개입되어야 하는가? 이일을 맡으면서 PR인의 서비스 범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고객이 정당한 주장을 할 때 그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PR은 분명 그 역할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약 6개월 동안 이 사건과 관련 PR업무를 하였고 그 이후는 예산상의 문제로 로스엔젤리스에 있는 법률 회사가 소송을 진행하고 저자의 회사는 손을 떼게 되었다. 이 법률 회사도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에 ‘성공불’(success fee)을 받는 조건이었다고 하였다. 그 이후 소송이 어떻게 결론났는지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 조봉구씨와 몇시간을 지내면서 저자가 느낀 생각은 또 다른데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후의 조봉구씨. 그는 불운하였지만 현재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행복지수를 누리고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재벌로서 매일 무거운 짐 속에서 편안한 날이 없는 ‘무거운 짐 진자’의 생활을 보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새로운 삶은 사는 조봉구씨. 얼굴모습에서 분명 그는 다 잃어 버린자가 아니었고 많은 것을 얻은 자의 모습이었다.




지금 조봉구씨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살아있다면 84세의 노인으로 미국 정부의 연금을 받으면서 작은 아파트에서 과거를 잊고 조용히 인생을 관조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최고의 “행복지수”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조사를 보니 행복 지수는 GNP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질적으론 가난하지만 정신적인 만족감이 큰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1위, 필리핀이 세계 5위, 대한민국이 24위 미국과 일본이 훨씬 뒤에 있다고 한다. 지금도 아마 17평 아파트 주위를 바쁘게 산책하고 있다면 그의  행복지수는 상당히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241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김사장, 이사실은 전세계에서 8명만 알고 있는 일이오. 당신이 그 8명안에 들어 있으니 얼마만큼 보안을 철저히 해야 되는 일인지 알겠죠.”


2001년 10월말 어느날 새벽2시경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 케피탈(New Bridge Capital)을 자문해주고 있는 미국인 컨설턴트인 모리씨가 제일은행장 월프레드 호리에씨의 전격적인 경질이 곧 있을것이라고 알려주고 거기에 관한 전략을 상의하기 위해 걸은 국제전화였다. 이틀 있으면 제주도에서 국내주요신문사들의 논설위원과 방송사의 해설위원을 대상으로 제일은행의 앞으로의 사업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서강대학교 김병주교수가 금융산업의 국제화에 대해 강연도 하고 또 그 이후에는 신선한 제주회를 즐길시간이 마련되어 모든 확인 작업과 호텔과 항공기예약이 완벽하게 다 끝난 시점에서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무척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호리에행장, 새로 취임할 코헨 행장, 나와 당신의 4명을 제외하고서 뉴브리지의 최고책임자들 4사람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당신 부인에게도 이 이야기는 건네면 안 됩니다. 서울에 있는 제일은행내의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지금부터 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당신과 내가 오로지 국제전화를 통해서 일을 진행 시킬테니 잘 협조해주기 바랍니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새벽2시에 걸려온 전화는 청천 벽력같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우선 일차적으로 제주도 세미나는 그래도 진행하는데 합의하였고 세미나에 참석할 논설위원들에게 엠바고(embargo)를 부쳐서 그 내용을 알려 줄것인지, 말 것인지 아니면 off-the-record 로 정보를 줄 건인지가 주요 현안이었다. 우리 둘은 쉽게 행장교체에 대한 내용을 제주도에서는 일체 밝히지 않으며 공식 발표 후에 세미나에 참석한 논설위원들과 해설위원들에게 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때 미리 알려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사과의 편지를 보내도록 결정했다.




제주도 세미나에는 제일은행의 홍보부장, 부행장과 주요 임원들이 참석했다. 원래 세미나 첫날 호리에 행장이 참석하게 되어 있었으나 마지막순간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고 알리고 그때까지 미국에 머물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임원들이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느끼고 그간 저자가 뉴브리지의 본사와 깊이 업무를 진행해온 것을 알고 저자는 뭔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목을 조여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집사람에게도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으니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그들을 멀리하고서 호텔방에 들어와 다시 미국에 전화를 해서 발표할 보도자료내용을 팩스로 서로 주고받으면서 최종정리를 하고 호리에 행장과 신임 코헨 행장의 기자회견에 대해서 전체적인 진행을 협의하였다. 그 이튿날 공식 보도자료가 나가고 기자회견까지 진행되니 제일은행임원과 그때 같이 갔던 몇몇 언론인들은 저자를 원망하면서 섭섭하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해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호리에 행장의 1년 10개월은 막을 내리게 되고 코헨 행장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년 10개월 동안 호리에 행장은 무척 많은 일을 하였다. 호리에 행장 취임 초기 뉴브리지의 컨설턴트 모리씨가 한국에 와서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롯데호텔 커피숍에서 차 한잔하자는 전갈이 와서 나가니 예상치도 못하게 그 자리에는 호리에 행장이 나와있었다. 행장으로서의 계획과 앞으로 역점을 두고 진행할 사업과 몇몇 언론들이 외국자본에 대해 비우호적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후 계약이 급속히  진행되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남은 호리에 행장 방에서 이루어졌으며 배석자 없이 단 둘이 만나게 되었다. 만나자마자 제일은행 카렌다가 걸려 있는 곳으로 저자를 안내하면서 카렌다 안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 은행달력에 들어가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국민학생들이 그린 것 같은 아주 아마추어적인 그림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는 “김사장, 내가 부임 초기 카렌다 제작하는 일반관례를 이야기 들어보니 유명화가들에게 의뢰하여 비싼돈을 주고서 그림을 구입해서 카렌다에 그림을 넣고 그리고 그 그림들을 정부나 다른 쪽에 선물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소. 그리고 어느 날 직원들의 자녀들중 그림에 재주가 있는 소년, 소녀를 모아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전문가가 12개를 뽑아서 이렇게 카렌다가 된 것입니다. ” 놀라운 일이다. 화가에게 그림을 부탁하면서 많은 돈을 쓴 것을 절약했고, 정부나 다른 쪽에 그 그림을 일종의 뇌물로 바치는 부패의 고리를 차단하였고, 또 직원들이 이제 우리 아들, 딸의 그림도 은행 카렌다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애사심을 높인 그 조치들은 돈으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직원들과 고차원적인 커뮤니케이션(employee communication)을 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PR인들도 쉽게 생각하지 못한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기법이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2001년 호놀룰루 마라톤대회에 단체로 참가한 호리에 행장과 제일은행직원들의 이야기이고 그때 참석한 직원들은 호놀룰루마라톤대회를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에 비유하기도하였다. 제일은행이 많은 문제를 안고 외국에 팔렸기에 따가운 국민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데 한가롭고 사치스럽게 18명씩이나 해외마라톤대회에 참가시키느냐라는 비난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시점이었으나 호리에는 과감하게 참여를 결정한다. 호리에 행장은 호놀룰루마라톤대회 내내 대회에 참가한 직원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그는 대회 중에는 주로 32km 지점쯤에서 오렌지를 썰면서 자원봉사자로 참가하였다. 태극기와 제일은행 깃발을 텐트에 걸고 밴드도 동원하여 열심히 응원하였다.



호리에 행장의 부인도 참가자들에게 물을 나눠주며 열심히 봉사하였다. “마라톤에서 가장 힘들어지는 30km 이후 지점에서 행장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는 제일은행 직원들의 마음에 밀려올 감동이 얼마나 클지 저는 직원이 아닌데도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고 선주성 마라톤 컬럼니스트는 회고하였다. “저와 같이 갔던 일행들은 모두 완주 후에 호텔로 향했습니다. 호텔로 호리에 행장의 전화가 왔습니다. 대회 결승점이 있는 카피올리니 공원 한 쪽에 간단하게 점심을 준비했으니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호리에 행장이 일일이 직원들의 밥을 떠주며 완주한 직원들을 개선장군처럼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쇼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빛과 손길, 그리고 호리에 부인의 따듯한 말씀, 이 모든 것은 직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진심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주성씨의 이야기다.




호리에 행장은 연봉 34억원의 사나이였다. 연봉 34억원은 물론 큰 액수이다. 그러나 그가 CEO로서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은행의 이미지를 개선한 것을 돈으로 평가한다면 34억보다는 휠씬 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계 경제를 움직인다는 미국 맥그로 힐에서 발간하는 비즈니스위크지는 “한국 금융시스템을 개혁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호리에 행장이다”라고 호리에 행장을 평가하였다. 호리에 그는 분명 사내직원 커뮤니케이션(employee communication)과 이문화 커뮤니케이션(intercultural communication) 의 최고 전문가임에 틀림없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240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이 빅딜의 홍역을 치뤘고 내부적인 구조조정의 몸살을 앓고있다. 코닥사의 구조조정은 PR측면에서 깊이 살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8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붐이 일었던 사업다각화 추세에 편승하여 컴퓨터사업, 제약분야, 그리고 가정용 화학제품(마루바닥 청소제)에 까지 사업영역을 확장시켰던 이스트만 코닥사(Eastman Kodak Company)는 1990년대 경제불황에 따른 영업여건 악화로 부채가 78억 달러에 이르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코닥사의 계열사로는 우리가 잘 아는 바이엘제약의 아스피린 제조사인 스터링 윈스로프(Sterling Winthrop)사와 혈액분석기 및 다른 보건관련제품 생산 메이커인 클리니컬 디아그노스틱사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코닥사는 ‘93. 12월, 당시 경영의 귀재로 불리어지고 있던 모토롤라의 조지 피셔(George Fisher) 회장을 영입하면서 회사의 적자구조를 해소하기 위한 경영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회사의 활동에 대한 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지지 획득을 위한 IR활동의 중요성이 대두된다.

피셔 회장은 코닥사의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부임 초 다각적인 형태의 조사(research)를 실시하게 되는데, 전문적인 기업분석가(analysts)들의 견해에 대한 검토, 대주주들과의 일대일 면담,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등을 통해 코닥의 방만한 사업 확장과 주력업종의 지원에 대한 소홀함이 주된 원인임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의견과 객관적 자료들을 확보하게 된다. 아울러 코닥사의 주거래 은행들도 '업종 전문화'만이 코닥사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코닥사는 "제일 잘하고 있는 분야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업종 전문화 전략 아래 의료분야 등 기타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회사의 모든 역량을 전통적 주력업종이었던 영상(imaging) 관련 분야로만 집중시키는 사업구조 단순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매각 대상으로 선정된 업종의 사원과 고객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고, 주주나 재정적 후원 단체들에게 사업구조 단순화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시킴으로써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게 되었다.

PR의 목표는:

-- 일반투자자, 소비자, 사원 등의 공중에게 새로운 구조조정에 대한 이해와 지지를 얻는다.

-- 매각 업종 사원들의 업무태도에 변함이 없도록 유도한다.

-- 매각 업종의 주 고객들에게 생길 수 있는 불안심리를 최소화한다.

주요 공중은 일반투자자, 기관투자자, 기업경영분석가들이었으며, 이차 공중은 소비자, 사원, 고객 등이었다.

PR의 기본 적략은, 현재의 재정상태를 거짓없이 대상 공중들에게 알리며, 매각 업종의 차기 사업권자 선정과정에서 최대한 일반투자자, 소비자, 사원들의 이익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며, 업종 전문화 계획 발표 후 하부계획은 기업 전체 차원에서 성실히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건분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엑스레이 영상사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키 메시지(Key Message)는, 업종 전문화가 코닥의 부채를 줄이고, 브랜드가 지니고 있는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최상의 선택임을 투자자들에게 정확히 인식시킴으로써 그들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내고, 아울러 매각 대상으로 선정된 기업들이 기업 전체 차원에서 업종 전문화를 위해 부득이 포기해야 하는 것이지, 사업성이 떨어져서가 아님을 부각시키며, ‘코닥은 매각 업종의 사원과 소비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각오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소규모의 회사 내의 PR팀이 PR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외부 PR대행사를 고용하여 계획과 집행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공식발표 전에 보안이 철저히 지켜지게 하며 사전에 정보가 새나가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하였다.

1단계로,

1994년 5월 3일 코닥은 회사가 처해 있는 재정적 상태를 내부 소식지와 회사별 회의를 통해 전 사원들에게 알리고, 아울러 기자회견과 주주회의를 개최해 주요 투자자들과 언론에 회사의 재정상태를 솔직하게 공개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관료, 자재 제공자, 관련협회와 다른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 동시에 이 내용이 전달되었다.

2단계로,

1994년 5월 11일에는 코닥사의 연차총회를 개최하여 주주와 기관투자자들을 초대, 최고 경영자들이 직접 기업의 경영전략을 소개하고 이해를 구하였다. 아울러 회사 내부적으로 직통전화 개설, 개별 접촉 추진, 대화방 개설 및 뉴스레터 등을 통해 사원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사원들의 신뢰와 지지를 확보하였다. 또한 판매 및 마케팅부서의 간부들은 매각 대상 사업의 소비자들을 위한 심도 깊은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만들어 구조조정 과정에서 그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는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는 코닥사의 노력을 충분히 이해시켰다.

3단계로,

1.2단계 전략의 성공적인 수행을 바탕으로 의료사업 등의 정리 대상 업종을 매수하고자 하는 기업들과 사원들과 고객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에 주력하였으며, 모든 발표를 “코닥의 주력업종에 대한 집중이 결국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시키고 코닥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전략에 일치시켰다.

PR의 결과로 비록 부정적인 기업정보라 하더라도 이를 솔직하게 공표함으로써 투자자, 소비자, 사원, 기타 공중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불확실성은 투자자들에게 가장 나쁜 적이며, IR관계자들은 투자자들이 기업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 불확실성을 제거해 주는데 노력해야 하며, 기업내부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이를 솔직히 공개하지 않고 마치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결국 기업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단기적으로는 현실적 어려움을 위장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그 기업의 신뢰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나쁜 뉴스가 반드시 부정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단지 다루기 어려울 뿐이다.(나쁜 뉴스는 투자자들이 이를 납득할 만큼 설명하기 어려울 뿐이지 일단 투자손실의 배경, 예컨대 장기적 이익을 위한 의도적 투자에 따른 단기손실 등을 정확히 이해시킨다면 투자손실의 뉴스가 주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최고 경영자들이 직접 개혁의 선두에 서서 회사의 경영전략을 설명하고, 아울러 주변 공중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다양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만드는 데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우리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통상적으로 대기업들은 수익성 있는 사업의 매각보다는 인원감축, 정리해고 등 종사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방법을 통해 적자를 해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코닥은 이런 문제점을 방지하고, 매각 대상 업종의 차기 사업권자 선정시 기존에 종사하던 사원들이 일자리를 잃는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매각협상 기간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사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신경을 씀으로써 사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전(全)사적인 차원에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결국 코닥사와 펴서 회장의 이러한 사업구조 단순화 전략은 1년만에 코닥의 부채를 76억 달러에서 16억 여 달러까지 줄이는데 기여하였고, 회사의 주가도 25%나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최근에 코닥사는 파격적인 저가 정책으로 미국의 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일본의 후지필름에게 시장 점유율을 크게 잠식당하면서 새로운 위기에 처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 수년간 꾸준한 감량경영, 조직의 슬림화를 통해 탄탄한 재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후지사의 우세를 거론하면서 피셔 회장이 취임 초기 인력감축을 통한 비용절감을 더 꾀했어야 한다고 지적하고도 있다. 코닥사는 피셔 회장초기에 “Project WINGS”라는 구조조정 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성공하였으나 현재 또 다른 하나의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코닥사의 기업 이미지를 지속시키면서 계속적인 기업발전을 꽤하기 위해 어떤 PR전략을 펼쳐야만 할까에 또 하나의 숙제를 남기고 있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93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미국 버지니아 피드몬트(Piedmont) 지역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수도인 워싱톤에서 35마일 떨어진 곳이다. 야산과 말농장, 포도밭 그리고 목가적인 농촌지대인 이곳은 남북전쟁 당시 주요 격전지로서 가까운 곳의 시끌벅적한 워싱톤과는 대조가 되는 평온한 지역이다. 그러나 1993년 11월 이 조용한 도시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월트 디즈니(Walt Disney)사가 피드몬드 근처 작은 마을인 헤이마켓이라는 곳 땅 3000에이커를 구입하였으며 이곳에 미국역사 테마파크(Disney‘s America)를 만들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지역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이 디즈니를 환영하였지만 일반대중은 이 테마파크를 반대하였다. 지역사회 모임과 포럼 등에서 지역 시민들은 교통체중, 공해문제, 상가의 발달, 역사적인 장소가 놀이터로 전략하는 것, 테마파크 직원들의 비성수기 실업문제 등을 언급하며 피드몬트의 평화스러운 삶의 붕괴를 걱정하였다. 환경단체와 역사보존단체, 땅주인 그리고 피드몬트의 주민들은 재빨리 피드몬트 환경문제 위원회(Piedmont Environmental Council : PEC)를 조직적으로 결성하여, “Disney, Take a Second Look(디즈니여, 딴곳을...)”이라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캠페인은 1994년 디즈니의 테마파크 조성결과를 포기하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1. 연구조사 : PEC는 막강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갖고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면서 좋은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디즈니를 상대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들의 목표를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겁내지 않았다. “Take a second look”캠페인은 디즈니사에 대해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디즈니에게 다른 곳을 선택해 달라는 우회적인 접근을 은연중에 그 슬로건에서 의미하고 있다.

PEC의 위즐리 회장은 워싱톤에 있는 위드마이어 그룹(Widmeyer Group)이라는 PR회사를 고용하여 몇 차례의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실시하여 디즈니의 미국역사 테마공원에 대한 견해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테마공원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또한 디즈니는 일단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치게되면 매우 상처입기 쉽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 조사에 의하면 일단 한번 교통혼잡으로 인한 반대 및 이로 인한 삶의 질 저하, 그리고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비용 등이 알려지게 되면 디즈니사는 이로 인해 회사에 대한 이미지의 상당한 타격을 입게됨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PEC의 캠페인 메시지는 디즈니가 가지고 있는 마술적인 이미지를 걷어내고, 이 회사를 지역 사회와 납세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지역에 기반하는 다른 대기업들 중 하나로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다.

PEC는 또한 디즈니의 약점을 계속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디즈니가 테마공원 개발로 인한 경제적 이익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에 대해 PEC는 공해 문제를 덜 일으키고 사회적 간접자본 투자가 더 효율적이며 경제적으로 투자가치가 더 있는 다른 32곳을 발표하였다. 32곳의 다른 지역은 주로 북 버지니아나 워싱톤 수도지역에 있었으며 그곳은 피드몬트 지역보다 기존 인프라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비용이 훨씬 더 적게 든다는 50쪽에 달하는 한 민간 연구서의 내용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하였다(There are at least 32 better potential sites for the proposed park in the Region.).

 

2. 목표 : PEC는 디즈니의 테마공원을 피드몬트 헤이마켓 지역에 건설하지 않도록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이의 실행을 위해 이들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은 문제점들을 디즈니사에 제시하고, 디즈니에 역사 테마파크에 반대하는 PHA(Protect Historic America) 등과 연합하여 디즈니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도록 환경오염 및 역사적 유적지 파괴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하여 이와 같은 내용을 되도록 많은 미디어에 노출시키는 것으로 삼았다.

 

3. 실행 : 디즈니가 테마공원 건설계획을 발표하자 PEC는 바로 공격적인 캠페인 전략을 시작하여 여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개시하였다. PEC는 디즈니에 맞서 「다른 곳을 찾아라」캠페인을 시작하였고 이는 광범위한 매체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곳은 디즈니의 주차장(Disney‘s New Parking Lot)」이라는 스티커를 붙인 차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PEC의 계속된 반대전략에 디즈니를 위한 사회인프라 시설에 대한 채권발행이 차질을 입게 되었고 디즈니의 테마파크 건설의 장점에 대해서 점점 불신하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PEC는 다음과 같은 미디어 전략과 지역주민전략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다.

* 다른 지역들과 연대하여 테마파크를 반대하였다.

* 워싱톤의 네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디즈니 테마파크가 갖는 경제적인 부정적 요소들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실시하였다.

* 전국지나 지방지의 의견기고란(Op-Ed기사)에 PEC의 입장을 옹호하는 기사를 실리게한다. Op-Ed 투고자들은 저명한 언론인과 전직공무원들을 포함하였다.(이처럼 사설 맞은편에 즉 Opposite-Editorial에 실리는 기고란까지 이용했다는 것은 고도의 PR전문가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라디오와 신문에 「형제, 나에게 1억 5천 8백만 달러만 빌려주겠나(Brother, Can You Spare $158 Million?)」라는 광고를 실시하여 디즈니가 시민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끼친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 새롭게 건설되는 디즈니 테마파크가 대기오염문제를 크게 악화시키게 된다.

* 가능한한 많은 매체들에 노출하여 반대의견을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도록 하였다.

* 항의시위를 워싱톤에서 라이온 킹(Lion King) 시사회장에서 가졌으며, 디즈니사 사장인 마이클 아니즈너를 거짓말 왕(Lyin‘ King)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는데 이는 전국적인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내었다.

이와 같은 전략의 목표는 되도록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디즈니를 공격하고 PEC의 입장을 반복해서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4. 평가 : 1994년 9월 28일 디즈니사는 피드몬트 헤이마트에 테마파크를 세우려는 계획을 포기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PEC는 자신들이 성공했다는 다른 증거를 모을 필요가 없었다. 캠페인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디즈니에게 있어서는 맹렬하게 실시되는 미디어를 이용한 캠페인에 준비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디즈니 홍보스탭들은 퍼블릭 릴레이션 교과서에 있는 지침에 따라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마파크를 반대하는 측의 강도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였고, 시종일관 PEC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에 몰린 디즈니는 테마파크의 건설로 인해 모두에게 득이 되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던 것이 실패였다.

디즈니사는 미국을 대표할 만한 거대회사이고 디즈니가 America‘s Disney라는 계획으로 역사 테마공원을 세우려는 피드몬트 헤이마켓이라는 곳의 주민은 고작 483명이었다. 또한 디즈니가 가져다주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세금의 증가는 당시 프린스 윌리엄이라는 빠르게 성장하는 인근 도시들에게는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었으며, 버지니아 주지사, 이 지역 정치가 및 프린스 윌리암의 주민들도 디즈니의 계획에 찬성하였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PEC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다음은 전 뉴욕 타임즈 특파원이었으며 PHA의 중역이었던 루디 암브람손(Rudy Ambramson)과 작가인 닉 코츠(Nick Kotz)가 쓴 디즈니와의 전쟁(The Battle to Stop Disney‘s America)이 그 승리의 배경을 잘 설명해 주고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디즈니가 거대한 역사 테마파크의 건설을 발표하자 PHA(Protect Historic America)는 이 건설로 말미암아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귀중한 역사가 파괴될 것이라고 확신하였고 역사학자와 문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즉각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도 PEC 및 다른 단체들도 이곳 전쟁유적지를 지키기 위해서 강렬하게 디즈니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PHA는 디즈니의 테마파크 건설을 피드몬트 지역에 있는 64개의 역사적 유적지(22개의 남북전쟁터, 13개의 역사적 도시, 17개의 역사거리)를 파괴하게 됨을 강조하였고, PHA는 환경오염문제 및 교통난 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디즈니는 로비스트들과 PR 전문가들을 무더기로 고용하여서 주민들에게 여행자들로 인한 수입증대, 새로운 사업기회, 토지가격 인상, 디즈니사가 앞으로 이 도시에 낼 엄청난 세금 등에 대해 주로 홍보활동을 펼쳤는데 여기에는 교통정체, 물 부족 및 공기 오염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곳 주민을 경제적 이익에 어둡고 자신 옛날 생활방식에 집착하는 여우 사냥꾼이나 시골농부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았으며 PHA의 3000명의 맴버들을 조직으로 여기지 않고 친목단체정도로 여겼다.

곧이어 PHA가 디즈니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는데, PHA는 이슈를 전국적으로 알리려는 데 주목하였다. 그리고 역사가들과 언론인 그리고 교수들 및 환경운동가, 목사 및 유명한 전직 대정부관계 PR 책임자 및 PR전문가들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반대운동이 점점 조직화되자 다른 관련 단체들도 참여하기 시작했고 Trust for Historic Preservation이라는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한 단체는 전국 유력 신문에 디즈니를 막자는 전면 광고를 하였다.

이렇게 디즈니의 역사 테마파크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PBC 등의 방송에서 남북전쟁 등의 인기 프로그램을 방영하게 되면서 모든 국민이 이곳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역사를 지키자라는 여론이 강해지나 디즈니의 사장 아이즈너는 1994년 9월 28일 포기를 선언하였다.

디즈니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를 단순히 말하자면 한가지 목적에 많은 단체가 모였다는 것이다. 디즈니와의 전쟁에서 피드몬트 지역은 시골의 땅이라고 해서 개발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고, 지역이익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성과를 얻었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90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32개의 목재관련산업과 그 화학가공업자들을 대표하는 미국목재보존협회(AWPI)는 1994년에 도전에 직면하였다. 다양한 목재산업분야를 대표하는 12개 이상의 동업자연합의 하나인 AWPI는 그 회원들과 공중에 미치는 PR프로그램을 개발해냈다. 동 PR프로그램은 사전대응적인 PR 활동을 통해서 회원들과 공중의 지원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캠페인 2000“으로 명명된 이 PR프로그램은 많은 약속과 함께 1994년에 화려하게 출발하였으며 다음의 3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다.

-- 공중에의 인지도와, AWPI와 그 회원들에 대한 이미지 제고

-- 이 산업에 대한 비판에의 대응

-- 여타 건축재료(콘크리트, 강철 및 플라스틱 등)에 맞서서 시장유지

"캠페인 2000"은 동 PR 프로그램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회원과 비회원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조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PR전략을 발전시키기 위해 고용된 PR회사는 PR프로그램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협회와 명확한 합의점을 찾을 수 없어 캠페인 2000은 1994년에는 발표한 목표에 미치지 못하였다. 캠페인 2000을 위하여 어떤 프로그램들을 수행할 것인가에 관하여 직원들과 위원회 멤버들이 논쟁하는 사이에 수개월이 흘러갔으며, 결과적으로 1995년 초까지 동 프로그램은 초점이 없이 표류하였다. 회원과 비회원 후원자들의 불만은 지도부의 교체로 이어졌다. AWPI의 새 이사진과, 1995년 봄에 교체된 직원들은 캠페인 2000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집중시키고, 이를 성공적인 PR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였다.

AWPI의 새 직원들은 캠페인 2000을 준비하기 위해 과거 협회에 의해 수행된 광범위한 조사결과를 분석했다. 또 목재관련산업에 있어서의 핵심적인 인사들에 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이는 이 프로그램이 지지를 얻고 있는 지 또한 계속되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또 동 캠페인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도출하기 위해서였다. 나타난 의견들은 동 캠페인의 계획과 목표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나타내었지만, 응답자들은 너무도 많은 약속들이 동 캠페인의 시작 단계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결과로 동프로그램의 시작과 1994년 말 사이에 거의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1년 동안의 재정적 후원 후에 가시적인 것이 거의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들 조사 결과, 동 캠페인이 초창기의 약속에 못미침을 이유로 해서 협회에 가지고 있는 저류의 불만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거의 50%의 후원자들이 협회의 회원이 아니었다. 그 조사결과는 회원 가능성이 있는 중요한 그룹에 대하여 협회가 “신뢰를 상실”하였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조사결과 수정된 목표는 (1) 매우 가시적인 프로그램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회원, 비회원에의 캠페인 2000의 인지도 제고, (2) AWPI와 그 회원들의 공공인지도와 이미지 제고, (3) 압축목재에 대한 일반의 관심사를 사전대응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4) 압축목재가 환경적으로 건전한 건축소재라는 메시지로 회원과 잠재적 회원들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협회는 캠페인 2000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6가지 주요 PR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1995년 10월 초 AWPI는 가공목재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전문지에 광고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소매상, 중개상, 그리고 가공목재를 사용하는 운송산업에 종사하는 독자층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노력은 40,000명 이상의 건축업자, 건자재 공급업자, 엔지니어 및 건축가 등에게 D.M.을 발송하는 것이었다. DM의 목적은 상품에 대한 정확하고 적극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압축가공목재의 사용을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DM에는 제품을 선전하는 편지와 압축가공목재의 기초정보를 담은 소책자가 포함되었다.

세 번째로 월간 뉴스레터를 포함한 인쇄물제작이었다. 새로운 그래픽 이미지를 통해 디자인을 수정하고 새로운 통계자료와 소비자 정보를 담은 새로운 출판물을 펴냈다. 80 쪽 가량 되는 새 브로셔는 20쪽의 요약문과 함께 가공목재의 안전성을 비롯한 최신의 과학적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출판물은 회원, 비회원, 그리고 캠페인 2000의 구독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네 번째로 잠재시장이 있는 전문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문전시부스를 개발하였다. 이 계획은 잠재적인 시장을 확보하려는 AWPI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며, 건축 자재에 대해 교육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하였다.

다섯 번째 요소는 대중 매체 활용 방안으로 수백 개의 방송사에 짧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다. 이 계획의 효과는 일반 대중들에게 가공 목재와 그 안전성, 이용방법에 대한 전반적인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 요소는 캠페인 2000에 대한 연말보고서를 출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 해 전체의 결과를 종합하고 평가하며 내년의 계획과 목표를 공시하였다.

위와 같은 노력 후에 실시된 평가가 실시되었다. 캠페인 2000이 태도변화에 얼마나 성공하였는가를 알기 위해 전체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통해 AWPI의 활동을 1에서 5의 척도를 부여하게 했다.(1이 최고의 점수이다) 40개 질문에 대한 결과는 전체적인 수행에 대해 ‘만족할 만한’과 ‘뛰어난’의 사이인 2.5의 점수였다. 이는 캠페인이 즉각적이면서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원들은 협회의 달라진 의지와 변화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원을 보내게 되었다. 그 결과 1995년 말에는 협회가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캠페인은 임원진들의 의식 변화와 새로운 PR 담당자들의 투입으로 인해 새로운 활력소를 얻게되었으며 아울러 전문적인 시도를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이 캠페인은 비회원을 포함한 회원들에게 협회에 관한 인식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데 의의가 크다. PR 프로그램의 결과는 회원들이 협회가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 모든 일이 7개월간에 이루어졌으며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협회들이 있다. 협회가 과연 회원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자주 거론되고 있다. 협회의 고위층들이 새로운 각오로 협회의 발전과 회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일할 때 회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89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브리티시 텔레콤(British Telecommunication)은 영국의 대표적인 전화회사이다. 시내, 장거리, 그리고 국제전화를 설치, 운영하고 있으며, 초스피드 데이터통신, 무선호출 및 무선전화, 팩스, 전자우편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회사이다. BT의 전략적 PR활동은 BT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바꾸고, BT가 성공적으로 민영화된 기업이라는 기업이미지를 창출했다.

1987년경 BT 서부 스코틀랜드 지부에서 행한 여론조사를 통해 공중전화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드러났다. 잦은 고장, 불결, 전화 대수의 부족 등이 BT가 가진 이미지였다. 언론매체들은 BT를 비난하였고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사실 그 원인은 주로 기물을 부수고 현금을 탈취하는 반달리즘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 모든 잘못이 BT의 책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서부 스코틀랜드에 있는 BT 지사의 PR팀은 회사 이미지를 개선하고 고객서비스를 증진하기 위한 중기 PR프로그램을 도입, 그해 3월부터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프로그램의 주요행사를 계획하는 과정에서 BT가 기존의 전화기를 그 해 7월까지 그리고 기존의 빨간색 공중전화 박스는 1990년 중반까지 모두 교체할 계획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BT의 공중전화 사업국은 오래 전부터 신기술 시스템, 카드전화기 도입, 서비스 개선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연간 50만 파운드를 들여 반달리즘으로 훼손된 전화기를 수리해오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일단 상황파악이 끝나고 BT의 노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이벤트 및 BT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의 창출에 맞추어 다음과 같은 PR 프로그램이 계획되었다.

(1) 3월에는 PR팀은 경찰관을 대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 공중전화 파손 및 탈취행위가 얼마나 빈번한지 알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경찰의 협조를 요청했다. 경찰의 인지도가 점차 증가하면서 실제로 공중전화와 관련된 유죄 판결의 건수가 1986년에서 1987년도의 73건에서 1987년에서 1988년까지 109건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BT의 범죄방지 노력이 신문 사설이나 기획기사로 다루어졌다.

(2) 4월에는 시민의 경각심을 돕기 위해 심하게 파손된 공중전화가 경찰서나 시민회관 등지에 전시되어, 반달리즘에 대처하는 BT의 노력이 긍정적으로 알려졌다.

(3) 7월에는 글래스고에 있는 시민의 광장 박물관에 구형 빨간 공중전화 박스를 전시하였다. 이제 구형 빨간 공중전화의 시대는 끝나고 전자식 전화기의 시대가 도래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BT의 오랜 역사 및 서비스 개선의 의지도 함께 보여줄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기사가 집중적으로 보도되었다.

(4) 8월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중전화 보호 포스터 대회를 개최하였다. 어린이들에게 공중전화를 파손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을 심어주기 위한 이 행사는 미디어의 관심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켐페인으로 대중의 신뢰를 어느 정도 회복한 BT에게 다시 위기가 닥쳤다. 영국의 전자통신부(OFTEL)는 영국 내 76%의 공중전화만이 언제든지 사용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출간하였고, BT의 공중전화국은 다시 한번 대중의 비판대에 서야만 했다. 이에 대해 BT의 마이크 베트 이사는 1988년 3월까지 그 수치를 90%까지 올려놓겠다고 공언, BT는 다시 한번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BT에게는 전화국의 현대화 프로그램과 더불어 PR활동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서부 스코틀랜드 지역의 홍보팀에 더욱 많은 인원과 자금이 투입되었고, 본사의 홍보팀이 함께 협조하였다. 물론 엔지니어들도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노려했다. 매달 리서치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놀랄만한 진척을 보여주었다.

(1) 1988년 2월 마이크 애보트 고객 관리 및 홍보담당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수행하였다.

- 분기별 회의를 통해 진척 상황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논의한다.

- 홍보 대행사를 영입, 전국 대상으로 효과적 PR 활동 집행한다.

- 각 지역벌 홍보 담당자의 개별 프레젠테이션 실시한다.

이 같은 일련의 PR활동은 본사 PR팀이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으며, 대규모의 PR프로그램이 본사와 지역에서 동시에 수행되었다. 본사에서 정보수집, 보도자료 작성, 중기 PR전략 등을 수행하는 동안 지역별 PR팀에서는 각각 지역에 적합한 PR활동을 진행했다.

(2) 1988년 4월, " OFTE:L의 칼스버그 교수가 목표달성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로 BT에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이 주요일간지 1면 톱기사로 실렸다. 그 기사는 BT가 목표치를 92.3%로 초과 달성했다는 내용과 함께 그 동안 BT의 노력을 함께 보도했다.

4월 BT 본사 홍보실은 " 더 나은 공중전화 서비스 개선을 약속한다" 내용으로 보도자료를 추가 배포하였다.

(3) 6월에는 반달리즘과의 전쟁이란 제목으로 TV 기자회견을 실시, 150명의 경찰, 및 지역인사들을 초청하였다. 이 행사로 BT는 반달리즘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회사로 포지셔닝되었으며, 같은 문제로 고민하던 영국 철도나 런던운수에도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국영방송 광고를 통해 후속 기업광고를 내보내고 그 해 가을 대규모의 PR캠페인을 실시하였다.

일련의 프로그램들이 스코틀랜드의 국영신문에 게재되었고, 각 지방 및 국영라디오뿐 아니라 BBC와 지방자치 TV와의 인터뷰로 이어졌다. 이 캠페인은 BT가 강한 추진력을 가지고 고객 서비스를 증진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사례는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점과 효과적 PR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어떻게 유지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BT는 사업의 성격상 사업가, 국내전화 사용자, 공중전화 사용자 등 다양한 고객을 가지고, 고객들은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매일매일 BT에 대한 인식을 형성한다. 그리고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PR활동의 요점은 회사의 사업활동과 운영방식 등에 관해 대중을 교육하는데 맞추어져야 했다. 즉 서비스의 개선을 이루었을지라도 이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지 않는 한 대중의 인식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BT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효과적인 PR프로그램의 중요한 원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첫째, 대중의 BT에 대한 태도 및 의견에 대한 신중한 조사가 선행되었고, 조사 결과는 PR기간 내내 결과를 모니터링하는데 이용되었다. 둘째, 캠페인 기간 동안 효과적인 자료를 중앙지는 물론 지방지에까지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대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셋째, 경찰과 지역사회를 상대로 한 PR활동도 주효, 반달리즘에 대처하는 BT의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제3기관, 즉 영국 전자통신부의 BT에 대한 평가가 간과되어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권위있는 제3자의 의견은 아주 효과적인 PR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84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배상현
    2008년 10월 27일 22시 22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브리티시 텔레콤 검색을 통해 들어와서 좋은 PR캠페인 사례를 접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2008년 10월 29일 14시 54분
      댓글 주소 수정/삭제
      아주 전략적인 PR 캠페인이었습니다. 우리 PR인들에게 던지는 좋은 메세지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1989년 3월 24일 오전 8시 30분. 로렌스 로울(Lawrence G. Rawl) 엑슨사 회장은 엑슨사의 유조선이 좌초되어 알래스카 발데스(Valdes)항 인근의 프린스 윌리엄 사운드(Prince William Sound) 해상에 원유를 유출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 원유유출 사고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환경재해로 미국 전역에 걸쳐 다음과 같이 보도된다. “취중에 있었던 걸로 밝혀진 선장이 조종하던 978피트 유조선 엑슨 발데스(Exxon Valdez)호는 발데스항 남서해상 25마일 지점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했다. 유조선이 파손되면서 미국 원유유출사고 사상 최대인 25만 배럴의 원유가 유출되었다. 이 사고로 1천3백 평방 마일의 해상이 기름에 오염되었고 6백 마일에 달하는 해안선이 황폐화되었으며 4천 마리의 알래스카 해달이 목숨을 잃었다.”

이 경우 엑슨사의 딜레마는 다섯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

(1) 최고경영자의 태도

사고소식이 전해진 후, 첫번째 문제는 로울 회장이 직접 원유유출사고 현장에 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회장이 직접 알래스카로 가는 것은 엑슨사의 경영진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고에 대해 크게 우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엑스사의 중역들은 로울 회장이 맨하탄의 엑슨 본사에 남아서 좀더 효율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조언했고, 로울 회장은 사고현장에 가지 않았다. 로울 회장은 사고처리를 위해 하위직 중역들을 사고 현장에 파견했다. 그러나 미디어 전문가는 로울 회장이 사고현장에서 기름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새들을 직접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고 말했다.

(2) 미디어센터 설치 장소

사고 초기 엑슨사는 유출사고의 영향이 매우 큰 점을 인식하여 언론사들에 실시간대로 정보를 제공하고 엑슨사가 원유사고의 대응에 전념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이에 발데스항이 미디어센터를 설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결정하고 발데스항에 미디어센터를 설치했다. 그러나 발데스는 제한적인 통신 지국을 갖춘 알래스카의 외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엑슨사는 신속히 뉴스를 전파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이로 인해 뉴스미디어들은 정보로부터 차단되었다. 결과적으로 엑슨사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3) 대응의 신속성

위기관리에 있어서의 기본법칙은 "정보흐름을 앞서 읽어라" 이다. 이와 관련 엑슨사는 몇 가지 문제점를 안고 있었다. 첫째, 로울 회장이 유출사고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또 뒤늦게 발표한 내용은 미국 해안경비대, 알래스카 주 간부 등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이는 엑슨사가 마지못해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비추어졌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사고 발생 후 10일째 엑슨사는 166개 신문에 엑슨사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한 광고를 게재한다. 그 내용은 오히려 대중에게 유출사고와 관련하여 더 많은 의문점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 알래스카주 의회는 유출사고 발생 후 신속히 노스 슬롭(North Slope) 유전의 원유에 대한 세금을 인상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워싱턴의 의회위원회 역시 원유유출사고 책임의 범위를 넓히고 원유유출사고 배상액 및 기름오염 배상기금액을 증가시키기 위해 신속했다. 엑슨사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에 수동적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4) 프로파일의 수준

원유유출사고에 직면하여 엑슨사가 취한 기본적인 대응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동물구조 프로젝트 수립, 사고해역 기름 제거 작업 등에 상당한 부분의 비용을 부담하는 등 위기에 적절히 대응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엑슨사는 공공연히 유출사고에 따른 위기사태를 가볍게 언급했다. 로울 회장은 사고에 관해 발표하면서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심지어 CBS방송의 모닝뉴스(Morning News) 프로그램에 출현해서 엑슨사가 갖고 있는 기름제거 작업계획이 복잡하여 전체를 읽어보지는 못했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또한 엑슨사의 광고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대한 가벼운 대응 정도로 대중에게 비추어졌다. 엑슨사가 외부용역을 주어 촬영한 기름 제거작업 과정을 담은 비디오 자료의 릴리스는 언론기자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엑슨사는 엑슨사 주식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연금기금으로부터 요청이 있은 후에야 뒤늦게 환경전문가를 이사회에 합류시켰다.

(5) 사건의 여파 처리

엑슨사는 발데스항 원유유출사고를 연일 보도했던 알래스카 공영 라디오 방송(Alaska Public Radio Network)에 3만 달러를 기부한다. 그 라디오방송사는 엑슨사의 기부금을 거부했고 엑슨사의 조치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엑슨사의 유출사고와 그에 따른대응은 원유산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 의회 의원들은 원유유출에 관한 연방정부의 개입을 확대하기 위한 새로운 법안의 제정을 요구했다.

엑슨사의 발데스 위기사고는 예기치 못한 위기상황에서 기업이 대중의 이목을 받을 때 취해서는 안 될 대응조치에 관한 교과서적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81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정부기관 중에서 연간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최고 액수의 PR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이 중에는 대국민 정보활동비로 5백만 달러, 연간 2백만 명에 이르는 9개 우주센터의 방문객 접대를 위한 공공서비스 비용 350만 달러도 포함되어 있다.

NASA는 미국의 정부기관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기민한 PR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기관으로 알려졌 있다. 1986년 1월 28일 단 73초 사이에 발생한 전례없는 참사로 인하여 NASA는 물론 국가 전체가 큰 위기에 몰렸을 때까지는 PR과 관련한 NASA의 명성에는 빈틈이 없었다. 우주선 챌린저호가 전국의 TV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발하여 7명의 탑승원 전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 최초의 일반 시민 우주비행사인 뉴햄프셔 고등학교 교사 크리스타 맥올리프씨도 희생됐다.

챌린저호 폭발은 국가적인 참사였을 뿐만 아니라 사고발생 후 NASA가 대처한 위기관리 측면에서도 참사로 기록된다. 우주선 발사 직후 폭발과 함께 2분 가까이 불덩이가 튀는 것이 TV화면에 생생하게 방영되었으며, NASA의 사령탑 해설자가 고장으로 인한 대폭발 사고라고 냉정한 목소리로 설명한 것 등은 위기상황에 대한 미숙한 대응이었다. 더욱이 NASA PR당국의 위기관리 매뉴얼에 의하면 사고발생 후 20분 내에 공식성명서를 발표하여 루머와 추측에 의한 부작용을 방지하도록 해 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참사 후 무려 5시간이 지나도록 사고와 관련하여 아무런 발표도 없었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NASA의 우주선 발사 책임자는 수백 명의 기자들에게 아무런 새로운 뉴스도 전달하지 못했다.

며칠간 NASA는 발사에 관련된 모든 서류, 심지어는 발사 수시간 직전의 기상과 기온에 관한 자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사고와 관련된 정보를 감춤으로써 기자들은 비공식적이거나 익명으로 발표되는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추측 기사들이 난무했다. 20년 넘게 NASA를 출입하면서 취재한 한 기자는 불꽃의 원인이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보조로켓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나중에 진실에 가장 근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NASA 당국자들은 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일체의 정보유출을 금하는 자세를 고수했다. NASA 직원의 표현에 의하면 우주왕복선 프로그램과 그 시행에 관련된 일체의 정보유출을 막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언론의 반발은 거세었다. 귀중한 인명과 기술의 상실과 함께 PR활동의 원칙에도 크게 어긋나는 행위라고 규탄하고, 향후 NASA의 신용과 명성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사건발생 후 2년 반 동안 챌린저호 참사에 대해 NASA가 취했던 언론대응이 여러 각도에서 비판되었다. 챌린저호의 잔해를 수거한 배가 귀항할 때에도 사진기자나 카메라맨이 촬영하지 못하도록 한 NASA의 부두 접근 금지 명령을 언론은 무시해 버렸다. 한편 우주비행사들의 시신이 도착했을 때 NASA는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빈 앰뷸런스를 공항 부근 병원에 파견하기까지 했다. 기자들은 분개했다.

그 후 고체연료 제작업체인 몰튼 티콜사가 1986년도 연차보고서에서 참사와 관련된 사항을 거의 언급하지 않은 사실에 언론은 주목했다. 각 미디어는 특집기사를 통하여 연료의 결함이 참사의 원인이었다고 보도했다. 또 사장단으로 구성된 참사조사위원회가 발사에 이의를 제기한 티콜사 실무진들의 의견을 책임자들이 무시한 사실을 밝히고 이를 사고의 원인으로 결론지었다고 보도했다.

1988년 겨울 PR리뷰지에는 "록웰사-우주선 참사 원인 규명에 미온적" 이라는 제목으로 비난기사를 실었다.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주계약업체인 록웰인터내셔널사가 NASA의 교사로 언론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존 카우프만 기자는 기사에서 록웰과 NASA의 '노-코멘트' 작전이 정보의 공동화를 초래하여 결국 기자들은 그들의 내부자 또는 적대적인 경쟁사에서 취재원을 찾는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챌린저호 참사는 인재였으며 또한 PR계의 비극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사관련 당사자들의 PR차원의 실수는 미국 우주산업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76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위기는 예고 없이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또 어떤 형태나 규모의 기업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기는 사전경고 단계를 거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기업이 위기를 부딪혔다는 것은 그 기업에 위험한 상황을 새로운 기회로 활용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된다. 존슨 앤 존슨은 위기를 기회로 이끈 위기관리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1982년 가을 미국 시카고에 있는 한 약국에서 타이레놀을 사서 복용한 일곱 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타이레놀을 제조한 맥네일(McNeil)의 모기업인 존슨 앤 존슨은 그동안 신뢰받던 제품이 어떻게 사람들을 죽게 했는지에 대해 전세계를 상대로 해명해야 하는 위기를 겪게 되었다.

1982년 9월 30일 PR담당 이사인 니펜은 여느 아침처럼 출근했다. 그때 PR담당자 중 한 사람이 그의 사무실로 뛰어들어와 방금 시카고 트리뷴지 기자로부터 이상한 전화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 기자는 타이레놀과 존슨 앤 존슨 그리고 맥네일의 관계에 관해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니펜 이사는 즉각 그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기자는 타이레놀과 그로 인한 사망 사건과의 관계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니펜은 그의 상관인 포스터 부사장에게 즉각 이 사실을 보고했다. PR담당 부사장인 포스터도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버크 회장에게 즉각 보고했다. 포스터는 처음에는 공장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버크 회장은 즉각 니펜과 함께 맥네일회장인 콜린스를 불러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바를 의논했다. 한 시간 반의 논의 후 콜린스와 니펜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맥네일 본사로 갔다.

기자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은 후 한 시간 반 동안 존슨 앤 존슨이 수행한 일은 다음과 같다. 우선 위기상황을 회장의 장악하에 두었다. 임원 중 한 사람에게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사건의 진상을 확인한 후 위기관리팀을 구성하게 했다. 둘째, 위기 관리자에게 PR전문가를 대동케 하여 함께 그 사고현장에 가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셋째, 사건에 관한 모든 정보를 회장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버크 회장은 시카고의 맥네일 콜린스 회장에게도 검시관 사무실 및 경찰서 등 어느 곳에서든지 신뢰할 만한 의료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콜린스 회장이 처리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는, 타이레놀로 인한 더 이상의 인명피해를 막는 것, 사망원인을 밝혀 내는 것,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으로 정해졌다.

며칠 후 제조공장에서 수송된 타이레놀의 조사 결과, 제품에 유해물을 첨가한 것은 외부에서 생겼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제 더 이상 존슨 앤 존슨사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자, 사망자 숫자가 급속도로 늘어나리라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회사 내외로 퍼져나갔으며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위기상황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져야 할 것 중 하나는 위기관리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이다. 즉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고 최고경영자에게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포스터는 버크 회장에게 직접 보고했다. 또 위기가 발생할 때 가장 중요시한 것은 소비자의 안전에 관한 책임이었다. 존슨 앤 존슨이 위기를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관리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포스터는 주저하지 않고 “회사가 책임감 있고 신속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존슨 앤 존슨의 위기 대응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존슨 앤 존슨은 특별전화선을 가설하고 50명의 PR실무자들이 신문과 방송기자들의 문의에 답하도록 했다. 이러한 신속한 조치를 통해 기자들은 지체없이 존슨 앤 존슨과 접촉하여 필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존슨 앤 존슨은 고객에게 어떤 결과를 끼쳤든간에 그 기업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영철학에 입각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고 교환하는 등 모든 것을 개방했다. PR담당이사를 포함하여 7명으로 구성된 위기관리위원회는 하루에 두 번씩 모여 상황판단 및 대책회의를 가졌다. 일반공중에 대한 경영자측의 의사발표를 일원화하기 위해 맥네일 회사 사장을 대변인으로 선정했다. 예상대로 PR부서는 각종 미디어로부터 첫 10일간 1,141건의 전화문의를 받았다. 사건이 진정되기까지는 무려 2,500건의 문의를 받았다.

한편 위기를 처리하는 과정 중 가장 시급한 일은 각 상점과 각 가정으로부터 타이레놀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존슨 앤 존슨은 사건 발생 직후 타이레놀 생산을 중단하고 타이레놀의 회수작업에 들어갔다. 타이레놀의 회수과정에서 쿠폰을 이미 타이레놀을 구입한 소비자에게는 쿠폰을 나눠주고 새로 제조한 타이레놀과 교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은 2.5달러짜리 쿠폰을 요청할 수 있는 무료 전화번호가 들어간 전면광고와 기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알렸다. 또 고객들에게 타이레놀의 안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무료전화를 사용하도록 권했다. 한편 위기사건 발생 후 존슨 앤 존슨은 연방조사단에 적극 협조하며 범인체포 현상금으로 10만 달러를 내걸었다.

회수작업 과정에서 존슨 앤 존슨은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에 따르면 위기사건에 대하여 90%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사고는 제조과정의 실수가 아니기 때문에 존슨 앤 존슨이 비난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데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존슨 앤 존슨은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타이레놀의 이미지는 심각하게 타격을 입어 시장점유율이 37%에서 6%로 떨어졌다. 당시 마케팅 전문가들은 존슨 앤 존슨이 타이레놀을 다시 판매하려면 상품명을 바꾸고 이미지를 개선해야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존슨 앤 존슨은 타이레놀의 이미지 회복 캠페인에 모험을 걸기로 했다. 우선 똑같은 위기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존슨 앤 존슨은 타이레놀에 시안화칼륨과 같은 이물질을 넣지 못하도록 용기를 새로 제조했다. 독약 투여행위를 중형으로 다스리고 조작방지 포장을 의무화하는 법률제정을 위해 국회의원 160명을 방문하며 로비활동을 전개했다.

존슨 앤 존슨이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그 이후에 공중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언론에 대한 공개정책, 둘째,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서도 제품을 회수한 점, 셋째, 공명정대한 게임정신이다. 무엇보다도 존슨 앤 존슨의 개방되고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은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해낸 열쇠였다. 존슨 앤 존슨은 위기상황을 공중에게 신속히 알리고 대처하는 데 뉴스미디어를 더 없이 좋은 도구로 사용했다. 또한 고객의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경영철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태도로 일관했다.

존슨 앤 존슨이 위기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절차는 PR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컨대 추가로 특별전화선을 설치하고, PR실무진을 늘림으로써 보도진이 위기 사건에 관한 정보를 신속하게 입수할 수 있도록 했으며, 노련한 대변인을 선정하여 일관성 있는 회사의 입장을 대변했다. 또한 정부조사단에게 긴밀하게 협조하여 공중으로부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존슨 앤 존슨이 오래 전부터 PR을 통해 미디어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점이다. 언론은 이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수습될 때까지 시종일관 공정한 보도를 했으며 기자들과 회사 대표들간의 충돌도 전혀 없었다. 이러한 관계는 존슨 앤 존슨이 오랜 기간 미디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결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업이 위기에 직면한 경우 공중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구체적인 수습절차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은 주지해야 할 점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74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디트로이트의 토마스 모나간(Thomas Monaghan)은 130억 달러 규모의 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피자 체인점인 도미노 피자를 설립했다. 모나간이 이끄는 도미노 피자는 1981년의 매출액 1억 7천9백만 달러에서 1990년대 초에는 20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달성함으로써 미국에서 두 번째로 빠르게 성장하는 프랜차이즈 회사로 발돋움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모나간은 이제 수백만 달러가 넘는 자동차를 수집하고, 디트로이트의 야구팀인 타이거스를 샀으며,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사회적 위치에 올라섰다.

도미노는 300개 점에서 10년 만에 약 5,000개가 넘는 지점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연간 약 2억 3천만 개의 피자를 판매해왔다. 도미노의 성공은 단순히 창업자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자를 주문한 고객이 30분 이상을 기다리지 않게 한다는 회사 방침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만약 30분이 넘으면 그 고객은 3달러의 할인을 받거나 무료로 피자를 받는다는 회사방침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도미노 피자의 이 서약은 한편으로 회사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다. 7만 명 내지 8만 명의 배달 운전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도미노피자의 30분 방침이 무모한 사고 및 죽음을 초래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1989년 6월 인디애나주의 열일곱 살 난 도미노 배달원이 운전사고로 죽는 일이 있었다. 비 때문에 미끄러운 도면에서 그의 소형 픽업트럭이 미끄러지면서 기둥에 부딪혀 사고가 났던 것이다. 그 배달원의 어머니는 도미노의 30분 방침이 바로 도로교통법을 어기라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30분 안에 배달하기 위해 무리하게 속도를 냈기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인디애나주의 상원의원인 리처드 루가(Richard Lugar)는 회사측에 30분 배달 방침을 재검토할 것을 서면으로 촉구했다. 또 피츠버그에서는 도미노 배달차가 한 가게 앞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를 들이받는 사고가 났다. 차에 타고 있었던 피해자는 도미노피자의 매니저가 사고현장에 달려와 피자를 배달해야 하니 빨리 협상을 끝내자고 했다며, 이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 해 9월 시카고에 있는 전국 작업환경 안전기관(National Safe Workplace Institute)은 보고서를 통해 최소한 10명의 아르바이트 학생인 도미노피자 배달운전자가 배달 중 사고로 사망했으며, 10명의 사상자를 낸 100건 정도의 교통사고에 연루되었다고 말했다.

전국 곳곳에서 도미노의 초고속 배달 방침을 철회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보험업계에서는 그 방침이 젊은 운전자들로 하여금 과속하게 하므로 각 체인점들의 30분방침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츠버그 사건을 담당한 법률전문가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사고를 당하고 있다. 이 배달원들은 30분 이내에 피자를 배달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멈춤' 표지판을 그냥 지나치거나, 과속을 하고 혹은 불법회전을 하게 된다. "

하지만 도미노는 전국적인 거센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 30분 방침을 철회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배달시에 발생되는 과속문제는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주로 피자체인점 부근에서 일어났으며, 이는 '지각의 문제(Perception Problem)'라는 입장을 밝혔다. 피자는 몇 분 이내에 만들어져 배달원들에게 전달되므로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도미노는 30분 방침이 배달원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주장들에 대해 대대적인 광고와 PR을 통해 방어전을 펼쳤다. 도미노의 전국적인 PR캠페인은 다음과 같다.

(1) 수백만 개의 피자 배달상자에 도미노 사장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붙였다. "30분 배달방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전한 배달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도미노의 배달시스템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배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약 2마일도 안 되는 평균 배달거리는 우리 배달원들이 여러분들의 집까지 배달하기에 충분한 18분 거리입니다. 수백만 번의 안전한 배달경험으로 우리는 그 시간이 넉넉하다는 것을 압니다.“

(2) 수신자 부담 전화 ‘1-800-DOMINOS'가 개설되어 일반인들이 난폭한 배달운전자들에 대한 불만을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3) 도미노 피자의 사진과 함께 '멈춤' 표시 및 수신자 부담 전화번호를 넣은 대형 포스터를 제작, 배포했다.

(4) 도미노는 언론에 공격적으로 안전을 강조하는 퍼블리시티를 했다. 도미노는 자사의 모든 배달 운전자들이 필수적으로 회사에서 마련한 8시간 운전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한다는 점을 알렸고, 또한 일부 도시에서는 좀더 강력한 운전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홍보했다. 도미노는 전국 5,000개 매장의 3분의 1 정도 되는 체인점에서 일하던 열여덟 살 미만의 배달운전자들을 교체했다.

(5) 도미노는 자사의 안전기록을 솔직하게 밝혔다. 도미노는 연간 약 20명의 직원들이 배달사고로 숨졌다고 밝혔다. 이는 약 1천1백5십만 개의 판매된 피자당 1명이 목숨을 잃은 셈이며, 물론 이들 사고가 모두 배달 중 발생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도미노는 배달 운전자들이 30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았으며, 그 시간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고객들에게 제공한 3달러는 그 배달원이 아닌 회사가 지급해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도미노는 항상 제일 늦게 배달하는 직원에게 주었던 "지각 왕" 배지 수여식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며, 최고의 운전 배달원들에게 인디애나폴리스 500(도미노가 후원하고 있었던 자동차경주 대회)의 여행권을 상으로 주기로 했던 계획을 중단하고, 대신 최소 5,000시간의 안전운행 시간을 보유한 배달원을 포상하는 계획을 새로 세우기로 했다.

(6) 도미노는 인쇄매체 광고를 통해 자사의 안전성 확보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을 강조했다. "우리는 12분만에 맛있는 피자를 만들어냅니다.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

도미노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부정적인 언론기사들이 잠잠해지고, 그에 맞추어 모나간 회장은 30분 방침이 아닌 다른 기사거리로 언론 노출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미노의 새로운 주력 메뉴를 발표했다. 낙태반대 단체에 기금을 내고, 미시건주의 리조트 시설에 35층짜리 '기울어진 피자빌딩' 건설을 계획했다. 곧이어 피츠버그 사건의 재판관은 30분 방침에 대한 소송의 무효를 선언했다. 도미노의 대변인은 재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도미노의 배달문제가 법정에서 제기되었다면 도미노의 안전운전에 대한 헌신적인 노력을 더욱 널리 알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실망스러워했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73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햄버거 대학(Hamburger University)은 세계적 패스트푸드 체인인 맥도날드(McDonald)의 프렌차이즈 점주들과 맥도날드(McDonald) 사원들의 자체 교육을 위하여 맥도날드(McDonald)가 경영하는 미국 일리노이 오우크부르크에 있는 세계적 경영훈련 센터이다. 98년 현재 총 5만 명이 넘는 세계 각지의 맥도널드 매니저들이 훈련을 받았다. 30여 명 이상의 학교내 거주 교수진이 총 22개 언어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영국, 일본, 독일 및 호주 등지에도 학교를 개설하여 지역 매니저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맥도널드의 사원 트레이닝 과정이 PR적 측면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미국의 몇몇 대규모 기업들도 이와 유사한 트레이닝 기관이 있다. 세계적 통신장비 업체인 모토롤라가 그 한 예이다. 모토롤라 대학은 맥도널드의 햄버거 대학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사내기관이다.

이러한 사내 교육기관들의 설치 목적은 해당 기업의 사명(Mission), 비전(Vision), 가치(Values), 리더십(Leadership) 등과 같은 기업의 정체성(Corporate Identity), 즉 기업문화(Corporate Culture)를 일차적으로는 사내 구성원들이 공유하기 위함이다. 이는 근래 대두되고 있는 기업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Corporate Communications)을 위한 준비 단계 중 하나이다. 기업의 경영요소로 더욱 강조되는 기업 커뮤니케이션(Corporate Communications)에서는 PR을 서로 다른 별개 프로그램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일관성과 통일성을 지닌 프로그램들의 흐름으로 본다. 기업 커뮤니케이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PR전략(Strategy)은 다름아닌 기업 정체성(Corporate Identity)의 수립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이 거울을 보고 섰을 때, 그 사람의 실제적 모습, 즉 그 사람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형태가 바로 정체성(Identity)이다. 이에 비해 거울에 비춰진 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이미지(Image)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관점에서 기업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바로 기업의 정체성(Corporate Identity)이다. 이에 비해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기업의 모습이 바로 기업 이미지(Corporate Image)인 것이다. 기업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은 다름아닌 공중이다. 흔히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목표하에 계획되는 PR프로그램들은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는 빚지 않고 애매한 거울만 이리저리 기울이고 흔들어 이미지를 바꾸려는 의도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모든 PR활동을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으로 볼 때 햄버거 대학은 맥도날드의 기업정체성(Corporate Identity)을 일선의 매니저들에게 연장(Extension)시키려는 전략적인 노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메뉴판의 언어가 다를 뿐 일관된 맥도날드의 이미지와 고유한 분위기는 맥도날드의 기업정체성(Corporate Identity)을 유지, 연장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PR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술이 아니다. 기업 자체가 전하고 전략적일 때 PR은 많은 부분 성공적인 결과를 보장받을 수 있다. 햄버거 대학과 같이 기업 자체의 정체성을 기업 내에서 공유하려는 노력은 기업의 성공적인 PR을 위한 필요 충분적 요소라 할 수 있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72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카톨릭주교 국가협의회와 미국 카톨릭협의회는 낙태 이슈에 대한 여론 형성에서 낙태 옹호론자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다고 판단하고 외부 PR 전문대행사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카톨릭주교 국가협의회는 1990년 초 버슨-마스텔러(Burson-Marstellar)에 PR전략 수립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하고 힐앤놀튼을 찾는다. 세계 최대의 PR대행사 중의 하나인 힐 앤 놀튼은 미국 카톨릭주교협의회 낙태반대위원회의 반 낙태운동을 PR하기로 했으며, 이로 인해 힐 앤 놀톤에게는 5년간 5백만 달러의 수익이 예상되었다.

힐 앤 놀튼 사장 봅 딜렌슈나이더(Bob Dilenschneider)는 힐 앤 놀튼이 창사 이래 모든 합법적인 조직이나 운동은 헌법으로 보장된 자기표현에 관한 권리를 보유함을 인정해 왔음을 밝히면서, 이 새로운 고객의 일을 맡았다. 당시 그는 이 새로운 고객으로 인해 특히 힐 앤 놀튼의 직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많은 힐 앤 놀튼의 직원들은 한 저명한 칼럼니스트의 칼럼을 통해서 힐 앤 놀튼이 미국 카톨릭협의회를 고객으로 받아들여 지원하기로 했음을 알게 되었으며, 회사가 이러한 사실을 직원들에게 알리는 방식에 대해 분노했다. 새 고객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힐 앤 놀튼 본사 직원 중 3분의 1이 항의서에 서명하고, 워싱턴과 뉴욕의 십여 명의 직원이 그 프로젝트 맡기를 거부하였다. 그 당시 힐 앤 놀튼 직원의 65%가 여성이었다.

결국 표현의 자유에 관한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1조를 인용한 메모가 직원들에게 보내졌다. 그 메모에는 미국카톨릭 협의회 일을 맡기 원하지 않은 직원들은 그것을 강요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러나 그 메모는 부서장들에 전달되었고, 그것을 회람하라는 분명한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 메모를 본 직원들은 그것을 개인적인 의사전달을 위한 진지한 시도라기보다는 보도자료로 여길 정도였다. 어떤 직원들은 자신의 동료가 여성이 가지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대해 크게 실망했다.

새 고객에 관한 칼럼 기사가 나오고 한 달 후, 힐 앤 놀튼의 뉴욕 사무소에서는 그 논쟁을 진정시키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딜렌 슈나이더 사장은 말했다. "우리 사업은고객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표하고자 하는 주의나 주장이 직원의 뜻에 위배될 때는 그 직원들은 자동적으로 그 일에서 제외된다. 예를들면 담배제조회사나 알코올음료 제조업자와 같은 고객의 일을 맡기를 거부한 직원이 있었다. 우리는 그러한 직원들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존중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 앤 놀튼의 여직원들은 여전히 새 고객 건에 대해 충격을 받은 상태였고, 혹자는 카톨릭주교평의회 고객에 관한 언론에서의 부정적인 보도의 원천이 힐 앤 놀톤 직원들 자신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PR분야의 많은 이들은 회사측을 옹호하고 나섰다. 한 PR학자는 "힐 앤 놀튼이 낙태 반대론을 PR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힐 앤 놀튼 직원이 이러한 입장을 지지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고객을 맡게 되는 PR회사는 그 고객이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의견을 표명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힐 앤 놀튼의 진정한 전문가는 개인적으로 낙태 반대론자의 입장에 반대할 수도 있으나, 여전히 낙태 반대론 또한 대중들에게 충분히 그리고 공평한 방식으로 의견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만일 PR분야의 종사자가 모든 적법한 입장이 대중에게 알려질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PR분야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 "

많은 힐 앤 놀튼의 직원들에게 진정한 문제는 회사측이 암묵적으로 낙태에 관한 법률을 변경시키려 했다고 믿는데 있다. 23년간 힐 앤 놀톤에서 근무한 한 여직원은 "힐 앤 놀튼이 이 문제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여성이 자신의 육체에 관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간섭하는 법률제정을 가져올 것이고, 이러한 법률은 결국 강제의 형태로 나타나며, 힐 앤 놀톤은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내직원 커뮤니케이션(employee communications) 위기의 전 과정을 통해 딜렌슈나이더 사장은 다음과 같은 그의 입장을 고수했다. 카톨릭 평의회와의 계약에 의하면 우리는 로비활동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가 낙태에 관한 견해와 프로젝트를 밝힘에 있어서, 우리는 대행사로서 전적으로 합법적인 활동을 할 것이고, 사실 그 일에는 수많은 미국인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 일을 맡은 것에 대해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달리 답변할 것이 없다.

여기서 생각해 볼만한 PR 측면에서의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힐 앤 놀튼은 언제 카톨릭주교협의회 고객 건에 대해 직원들에 알렸어야 했 는가? 사내 직원 커뮤니케이션(Employee Communications)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시기 적절하고(Timely), 정직하고(Honestly), 명확한(Clear)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노력에 있다. 그 중에서 시기(Timing)는 사내 커뮤니케이션의 성패를 초기에 좌우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민감한 이슈를 직원들이 제 삼자인 외부 칼럼리스트의 글에서 알게 되었다면, 회사는 성공적인 사내 커뮤니케이션의 타이밍을 놓친 격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직원들이 해당 이슈에 관련된 회사의 의도를 의심하게 할 뿐더러, 소외감에서 오는 회사에 대한 배타적, 비판적 태도를 불러오게 된다. 회사는 언제나 가능한 한 빠르게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개설해야 하고, 정직한 전략적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아끼면 안 된다.

(2) 힐 앤 놀튼이 직원들에 보낸 메모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메모를 좀 더 세련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힐 앤 놀튼은 이 사례에 있어서 초기의 사내직원 커뮤니케이션의 타이밍을 놓쳤을 뿐더러, 전략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확보하는데도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신속하게 전달되는 사용 가능한 채널의 확보측면에서 부서장들의 회람이라는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누가 보아도 구시대적이고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짧은 안목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회람의 내용면에 있어서도 메시지는 해당 이슈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입장과 지시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낙태에 관한 이슈는 사회적이기 이전에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밑바탕을 가지고 있는 이슈는 처음부터 개인 감정적 소구를 지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동안 여성을 위해 힐 앤 놀튼이 일해온 사업들을 언급하며, 이슈의 핵심은 낙태의 찬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PR 전문가집단으로서 우리 힐 앤 놀튼의 전문가적 직업의식에 있다는 것을 부드럽게 설명했어야 했다.

(3) 당신은 힐 앤 놀튼 관리자층이 직원들로부터 항의서한을 받았을 때 무엇을 조언할 수 있었는가? 모든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할 때 성공할 수 있다. 매니저에게 보내진 이메일이나 메모가 무시된다고 생각하는 직원들과의 사내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작 때부터 엄청난 실패의 위험성을 안고있다. 이러한 민감한 이슈에 대한 매니저들의 자세는 철저하게 직원들의 커뮤니케이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기 적절하고(Timely), 정직하고(Honesty), 명확한(Clear)한 하나하나의 답신은 필수적이다. 메시지 또한 회사의 정책을 그냥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낙태이슈에 있어서 직업적인 사명감과 개인적 성향을 구분하게 하는 의식분별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4) 힐 앤 놀튼은 미국 카톨릭평의회를 고객으로 받아들였어야 했는가? 힐 앤 놀튼이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 하기로 원했던 PR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직업적 사명감은 PR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바탕이다. 만약 힐 앤 놀튼이 사내직원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완벽한 노력을 경주하였다면, 이 세계 최고의 PR 전문가집단은 이러한 민감한 이슈를 세련된 방법으로 대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합법적 집단의 사회적 이슈에 대해 그들이 사회적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기하는 노력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끄는 것이 전문가로서 우리 PR인들이 가지는 사명이기 때문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71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유명한 원로교수 한 분이 인상깊은 고백을 한다. 그의 말인즉은 종강파티 자리를 빌어 솔직하게 그의 단점을 얘기해달라고 학생들에게 요청했다는 것이다. 교수님의 격의없는 질문에 평소 그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갖고 있던 학생 한 명이 ‘교수님은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세요...... 이론보다는 실제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행정적인 업무를 줄여 주셨으면 하고요...... 너무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는 부르지 마셨으면 하는데요..... 학생들이 교수님을 권위적이라고 해요...... 휴강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등 그에 대한 불만과 함께 남들이 얘기하는 그에 대한 단점까지 이러이러하다고 솔직하게 얘기한다. 그 교수는 그 자리에서는 수용하는 척 했지만 결국 그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원로교수조차 자신의 약점을 들추고 자신에 대한 불만을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모 언론사의 이 편집국장이 청와대를 출입하던 시절이었다. 청와대 대변인은 출입기자과 자주 어울려 술자리를 하는데 이러한 술자리는 보통 술자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주요 현안에 대해 정부가 어떤 방향의 정책을 택할 것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자리에 초청받지 못하는 것은 기자에게는 “안테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이 될 수 있다. 그날도 한바탕 술자리가 벌어져 다들 술에 흥건하게 취한 상태였다. 갑자기 대변인이 자기의 단점을 솔직히 얘기해달라고 요청하는데 모두들 입을 다물고 만다. 몇몇이 외교적인 발언만 하는데 당시 평기자였던 바로 그 편집국장이 나서 그 대변인의 잘못된 얘기를 적나라하게 펼쳐놓는다. 군인출신이었던 대변인은 그 자리에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 술자리 뒤로 그 대변인은 이 기자를 아는 척도 안 했다.

앞의 두 가지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취재원과 기자 사이에 식사나 술자리 아니면 커피 한잔을 같이 할 때 취재원은 기자의 유도성 질문에, 둘뿐이라는 안도감에 싸여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 기자만 알고 기사화하지는 마시오”라는 말은 기자에게는 ‘이 내용은 기사거리니 반드시 기사화해야 된다’는 뜻이 된다. 결국 이런 일로 낭패를 본 사례를 어렵지 않게 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로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함이 솔직함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PR에서의 기본원칙은 정직함이나 상황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는 지혜가 함께 요구된다고 하겠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65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경제기획원에서 오래 몸담아 오다 국방부의 예산 실장으로 잠깐 자리를 옮겼을 때도 소신행정을 펴서 경제기획원 관료로서는 보기 드문 소신파로 알려진 문희갑 대구시장. 문씨는 1984년도 정부예산 규모를 전년도 수준으로 동결하여 우리 재정사상(財政史上) 전무후무한 일로 평가되는 역사적인 예산개혁작업을 끝낸 후 그해 12월 말부터 전국민에 대한 경제홍보에 전력투구한다. TV, 라디오, 신문 등은 물론이요 공직자, 교사, 근로자, 농어민, 기업인 그리고 학생들을 포함한 그야말로 모든 국민계층을 상대로 하는 경제 교육과 홍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경제홍보는 경제학에 대한 깊은 학문적 배경 없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많은 경제관료들이 경제전문용어(jargon)을 섞어서 얘기해야만 권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 시대에 “일상적인 용어(lay language)"로 가슴에 와닿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PR의 큰 원칙 중의 하나가 “전문용어"를 쓰지 말고 “일상적인 용어"로 설명하라는 것이다. 그때 그의 경제홍보내용에 대한 명강의는 “보리밥 경제”라는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나는 흑자시대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얘기하면서 경제 체질을 개선하지 않고, 기업도 건전 경영을 외면하고, 국민들이 흑자시대의 생활 패턴을 즐기고만 있다면 IMF같은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한다고 역설하여 1984년부터 IMF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IMF사태를 예고한 그의 통찰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시장이 된 후에도 항상 진지하고 성실한 것만이 최선의 전략이라는 평소의 신조대로 시정 구석구석을 살피며 민선시장으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약간은 보수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그는 언론의 냉소적인 반응을 감수하기도 했다. 관리에서 정치가로의 변신은 된 그에게 많은 변화를 요구했다. 환경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정치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그를 생각하면 내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그의 마지막 대구시장 유세전이다. "엇싸, 엇싸......" 그 옛날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반대에 앞장섰던 김중태씨, 영화인 신성일, 엄앵란 부부, 그리고 문희갑 후보가 어느 한 초등학교 유세장의 교문 밖에서부터 유세장으로 약 300-4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문희갑 후보 지지자들이 운동장을 꽉 메우고 있었는데 문 후보가 교문으로 뛰어들어오니 교정은 순간 흥분의 도가니가 된다. 특히 신성일, 엄앵란과 김중태라니, 너무나 대조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들을 유세요원들의 맨 앞줄에 내세운 발상은 정말 천재적이 아닐 수 없다. 일반 아낙네들과 의식있는 지식인들을 골고루 겨냥한 고도의 선거전략인 것이다.

먼저 연단에 올라선 김중태씨는 그 당시 하늘에서, 땅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일어난 일련의 대형사고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영삼 대통령 정권을 비판하고 나섰다. "여러분, 현재의 이 죽음의 행렬이 어디까지 갈지 아십니까? 3,000 명은 죽어야 멈출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대구 시민들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 연설이었다. 그리고 나서 엄앵란씨가 주부들을 겨냥한 대조적인 연설을 한바탕 쏟아놓는다. 마지막으로 연단에 올라온 문 후보는 "대구 경제를 살립시다"고 외치면서 경제전문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대구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초대 민선 시장이 되었다. 그때 그의 연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알찬 내용이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국민대학교 강당에서 국민대학교 동문회장인 문희갑씨의 특별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제가 국민대학을 나오지 않고 만약 서울대학교를 나왔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민대학을 나왔기에 항상 더 최선을 다해야 좋은 대학 나온 사람과 같이 어깨를 겨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믿음있는 말 한마디한마디에 후배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가장 순수하고 진실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감동시키며, 신뢰를 쌓는 것이야말로 장기적으로는 “성공하는 PR"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자리였다. 석학 후쿠야마씨는 그의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21세기는 ”신뢰“가 있는 국가만이 번성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이제 국가만이 아니고 개인도 일관된 ”신뢰“를 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다. 이러한 신뢰는 다름아닌 21세기 PR의 기본이기도 하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64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어느 해 추운 겨울 서강대학교에서 제17회 PR교실이 마련되었다. 내가 한국PR협회 회장이었을 때 한번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최고의 외교관이라고 불려지던 김용식 전 외무장관을 연사로 초청한 적이 있다. 김 장관은 어려운 시절 주미대사를 지내셨던 분이시다.

“PR과 외교와의 관계에 대해 체험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연 원고를 미리 준비 못했습니다. 사실 영국 의회에서는 정부의 각료가 원고를 보고 읽는 것을 허락치 않습니다. 전 드골 프랑스 대통령도 연설을 할 때 보좌관이 써준 그대로 원고를 읽지 않고, 요지만을 살리면서 상황에 적절하게 관중과 호흡하며 연설을 했습니다”라고 첫마디를 꺼내며 그는 즉흥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1961년 그가 주영대사로 있을 때의 일로 그의 경험담은 시작된다. 아이슬란드의 어장을 영국 어선이 침입하여 아이슬란드가 드세게 항의하자 영국이 순양함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아이슬란드는 구라파 각 나라에 연락해서 그곳의 주요 TV가 직접 취재하게 하여 거대한 영국배와 아이슬란드의 조그만 배가 충돌하는 장면이 유럽 전역에 보도된다. 영국 최대의 신문 더 타임즈(The Times)조차 영국의 태도에 부정적으로 보도했고, 결국 영국이 후퇴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는 PR은 한 나라의 권익을 보호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PR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곧이어 그는 일본 외교관 시절의 에피소드를 하나 끄집어낸다. 일본이 한국으로부터 가지고 간 미술품이 우에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일본정부 소속인 것은 돌려주겠다는 원칙적인 입장이 정리되어 양측이 협상했으나 1개월동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return(돌려주는 것)과 present(희사하는 것) 사이의 견해차였다. 묘책을 생각하다 결국 나중에 두 단어를 수용하는 hand over(인도하는 것)로 결론을 내리는데 양측이 다 받아들이고(mutually acceptable) 해석은 각각 유리하게 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1961년 여름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을 내려서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의 일이다. 정확한 Oxford 영어를 구사하는 운전기사가 길거리에 파괴된 짚차를 보고서 아랍 게릴라들의 활동에 대해 단순히 “아랍 게릴라들이 한 짓이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감정적 코멘트를 배제하고 진지하게 객관성을 유지하는 그 운전사야말로 ‘진정한 PR인’이 아닌가 라고 그는 우리에게 되묻기도 한다. 만일 운전기사가 자기의 주장을 주입시키려고 했다면 거부 반응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1977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다시 주미대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조건 하나를 달았다. 그 당시 국회의원들이 미국을 자주 방문해서 일관성있게 잘 진행되어야 할 외교활동을 망친 뼈아픈 경험들이 있었기에 김용식 대사는 주미대사 수락 1차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당분간 국회의원 한 사람도 미국으로 보내지 말아주십시오.”였다.

박동선 사건 뒷처리를 위해 1977년부터 4년 반 동안 주미한국대사로 취임한 그는 박동선 사건은 다름아닌 PR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미국 최대의 PR회사에 용역을 의뢰했다. “300,000달러를 줄테니 한국을 위해서 PR전략 수립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현재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당신 나라 도울 수 없오”라고 거부(turn down)당했다”고 고백하며, 우리나라에 전문화된 PR회사가 많이 생겼으면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박동선 사건과 관련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8․15 대한민국 국경일(Independence Day) 리셉션이 워싱톤의 아메리카나 호텔에서 열릴 예정이다. 행사는 오후 6시 30분에 시작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동선 사건의 후유증 때문에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초조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후에 NBC, ABC, CBS등 TV기자들이 나타났고, 때마침 전 미8군 사령관인 벤프리트 장군이 나타났다. 벤프리트 장군은 “한국은 나의 조국과 마찬가지”라고 얘기하면서 분위기를 좋게 유도해 나갔다. 친한파로 존경받던 노장군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니 국회의원들도 뒤따라 들어왔다며 “한 사람의 친구를 만드는 것이 외교활동에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재삼 역설한다.

노 외교관은 외교교섭에 “100점은 있을 수 없다. 상대방에게 30점 주고 70점 정도면 족하다. 아니 6:4도 좋다.” 정말 PR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노 외교관의 멋진 말이었다. 김용식 장관은 외교는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장대한 드라마’라고 정의하면서 연기는 대사, 외무장관 그리고 국가원수가 하는 것이라고 재미있게 비유하기도 하며 그의 탁월한 말솜씨를 보였다.

저녁 9시가 넘어서 강의가 끝나자 검은 코트 깃을 올린 채 혼자 유유히 서강대 캠퍼스를 내려가는 노 외교관의 모습을 보면서 PR은 한 나라의 권익을 보호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정말 값진 교훈을 노 외교관의 생생한 경험으로부터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PR은 전쟁에서조차 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58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국내 PR산업의 신장은 대개 PR전문회사들이 선진 대형 PR회사와의 업무제휴를 통해 최신의 PR기법을 도입하여 PR의 업무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다, 몇몇 외국회사들은 직접 한국에 진출하여 활발한 PR서비스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서 엿볼 수 있다. 이에 한국 PR의 발전을 도모하기 이한 전문인들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89년 한국PR협회가 설립되었다.

얼마 후 제2대 회장으로 선임된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PR교실이다. 이는 1991년 1월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PR 업계와 학계의 관련인사들이 모여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이다. 80-100여명 정도의 PR 관련 인사들이 서강대학교에 모여 늦은 저녁시간까지 PR강의를 듣고, PR에 대한 최근 이슈를 논의하며, 관련 정보나 견해를 주고받는 이 모임을 통해 PR인들끼리의 희로애락조차도 나눌 수 있어 좋다. 또 학계와 업계 인사들이 함께 참가하는 이 PR교실을 통해 학계는 업계의 생생한 얘기를, 업계는 학계의 깊이 있는 연구를 접할 수 있어 모범적인 산학협동의 한 예가 되고 있다.었다. 현재까지 PR협회 회장단과 PR교실에서 논의된 주제와 강사는 다음과 같다.

 

<역대 한국PR협회 회장 명단>

 

초대회장

조 해 형

(주)나라기획 회장

2대회장

김 경 해

(주)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사장

3대회장

김 경 해

(주)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사장

4대회장

원 우 현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5대회장

김 명 하

(주)코래드 대표이사

6대회장

김 정 기

한국외국어대학교 부총장

7대회장

김 이 환

아남반도체(주) 부사장

8대회장

서 정 우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장

9대회장

이 형 균

대한언론인회 이사

10대회장(현재)

최 창 섭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제 목

강 사

제1회

퍼블리시티란 무엇인가
루머 잠재우기

이화여자대학교 윤희중 교수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신성인 실장


제2회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정치광고와
정치PR의 가능성 및 제한성
정치PR의 실제
정치PR의 기법


외국어대학교 김정기 교수

서울 커뮤니케이션즈 이두엽 사장
KPR 김민기 상무


제3회


기업문화와 PR커뮤니케이션
기업문화와 PR


서강대학교 김학수 교수
한국 마케팅 학술연구소 전정봉 소장

제4회

위기관리와 PR
위기상황하에서의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성균관대학교 박기순 교수
인터그램 이태하 이사

제5회

CI와 기업PR
CIP이론과 실제

국민대학교 윤호섭 교수
디자인포커스 구정순 사장

제6회

이벤트의 문화성
국내 이벤트업계의 현황 및 전망

수원대학교 김광옥 교수
코렉스기획 김영걸 사장

제7회

뉴미디어와 기업경영 : 기업PR을위한 뉴미디어의 활용을 중심으로

통신개발연구원 유의선 박사

제8회

기업의 국제PR : 문화적 장애요인을 중심으로
한국의 해외홍보

수원대학교 최윤희 교수

공보처 유운영 보도과장

제9회

조직커뮤니케이션과 PR
위기상황하에서의 내/외적 커뮤니케이션

한양대학교 김재범 교수
J&R 커뮤니케이션즈 이영수 부장

제10회

언론과 PR :
기자와 PR실무자와의 관계

조선일보 윤석홍 독자부장

제11회

기업문화와 PR

인피니트그룹 박병천 이사

제12회

언론중재

언론중재위원회 엄영철 부장

제13회

Corporate Positioning 및
Brand Positioning
행정 PR

인터그램 안동민 이사

한국학술진흥재단 정연춘 박사

제14회

Branding과 기업 PR

인피니트그룹 박영미 실장

제15회

국제 PR

고려대학교 안보섭 박사

제16회

Toward 2,000 : Issues and Developments in Public Relations

국제PR협회
회장 Mr. Jim Pritchitt

제17회

국제PR : 새로운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김용식 前 주미대사/외무장관

제18회

대선사례를 통해 본 정당홍보의 개선방향

박범진 민자당 국회의원

제19회

바람직한 PR실무자의 자질에 관한 연구

기업조직커뮤니케이션 연구소 이종화 소장

제20회

급변하는 PR환경

(주)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 김경해 사장

제21회

국제PR의 당면과제와 전망

한국국제교류재단 손주환 이사장

한편 한국PR협회와 더불어 1997년 창설된 한국홍보학회는 좀더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한국 PR의 진일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홍보학회 초대 회장은 이화여대 윤희중 교수, 2대 회장은 성균관대 박기순 교수가 역임했다. 현재는 중앙대 이준일 교수가 회장직을 맡아 수행하고 있으며, 차기 회장은 수원대 최윤희 교수가 맡을 예정이다. 한국홍보학회는 주로 분기별 학술 세미나를 통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한편 한국PR협회는 한국홍보학회와 공동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행사를 후원하기도 하며 한국 PR의 발전을 위한 파트너로 협력하고 있다. 이처럼 학계와 업계 양측 모두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어 한국 PR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57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김경해의 장학생이 아니면 외신기자 아니다.’ 이 말은 외신기자 사회에서 돌아다니던 얘기다. UPI, AFP, 로이타 통신, 이코노미스트(Economist), CNN, 뉴스위크(Newsweek), 아시아위크(Asiaweek),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 등 상당수의 외신기자들이 모두 비즈니스 코리아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PR 일을 하면서 외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Communications Korea)는 외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단적인 예로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가 주관하는 행사는 항상 가장 많은 기자들로 북적대곤 하였다. 그 모두가 비즈니스 코리아를 발행하면서 얻은 큰 자산이었다. 또 그들로부터 얻은 생생한 정보는 PR비즈니스를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곤 했다. 외국 클라이언트(client)들로부터 ‘김 사장을 만나면 항상 알찬 최신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 모두가 비즈니스 코리아의 옛 동료들에게서 얻은 정보라는 것을 나는 꼭 밝히곤 한다.

나의 오랜 친구들은 가끔씩 사업 정보도 알려준다. 외신기자들은 어느 기업이 한국에 진출한다는 등 최신의 업계정보를 제일 먼저 접하기에 정보를 얻게 되면 그들 스스로 생각하는 ‘친정’에 알려줘서 사업상 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도 그들이 한국 외신기자 사회의 주류로 훌륭한 언론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비즈니스 코리아 창간의 보람을 새삼스레 느끼곤 한다. 지금 비즈니스 코리아는 박정환 사장이 양도하여 잘 운영하고 있으며, 나는 PR인으로서 길에 매진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즈코리아만을 운영하고 있다. 아무튼 옛 친구들은 손에 익은 악기나 오래된 포도주처럼 익숙하면서 한편으로 반갑고 흐믓하며 나름대로의 멋이 있어 난 그들과의 만남을 무엇보다도 즐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53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코리아 헤럴드(Korea Herald)에서 정신없이 일하던 어느 날 로이타통신 서울지국의 이시호 지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현재 당신 월급의 다섯 배를 줄 테니 로이타통신으로 와서 일하지 않겠소” 한참 동안 고민하다 나는 로이타통신 특파원 생활을 시작했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30분 간격으로 라디오 뉴스를 모니터링하다 큰 기사가 있으면 분․초를 다투면서 기사를 써야하는 통신특파원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되었다.

정말 월급을 다섯 배 더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코리아헤럴드에 있을 때는 영어로 기사를 쓰면 부장과 외국인이 영어를 고쳐주었기에 별 부담없이 기사를 썼으나 한국인 지국장 한 분인 로이터통신에서는 내 선에서 거의 완벽한 영어 기사를 써야만 했다. 그리고 코리아헤럴드 기자 시절에는 기자들 사이에 흔히 비트(beat는 원래 경찰들의 순찰구역을 의미)라고 불리워지는 출입처가 있어서 출입처 관련 주요 기사만 쓰면 별 부담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로이타통신 특파원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유였다. 매일매일 터지는 모든 뉴스에 다 신경을 써야하고 특히나 통신사간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어떤 때는 피가 타는 듯한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특파원 생활에 일주일에 단 하루의 휴일이 주어진다. 지국장은 매주 일요일 그리고 나는 매주 수요일. 나는 일주일간의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북한산과 도봉산 등으로 혼자 등산을 가곤 했다. 그런데 한참 땀을 흘리고 중턱쯤 다다르면 어디선가 사복형사가 나타나 여러 가지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우선 내가 간첩이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이다. 신분증을 보이고 로이타통신 특파원이라고 해도 신분증이 가짜가 아닌지 꼬치꼬치 묻다 끝내는 산 아래 파출소까지 가서 최종적으로 신분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약 2년간의 고달픈 로이타통신 특파원 생활로 몸무게는 10kg정도 줄고 건강도 더할 나위 없이 나빠졌다. 때마침 코리아헤럴드의 윤익한 정치부장이 다시 일해보겠느냐는 요청이 있어서 특파원 생활을 접고 다시 코리아헤럴드로 돌아갔다.

사실 나는 통신사에 근무하면서 치열한 경쟁의 급류를 타는 통신사 기자의 생리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고 그러한 경험은 그 뒤 나의 기자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급한 뉴스는 UU(urgent urgent) 코드를 달면 전세계 텔리타이프에 찍히는 시간까지 약 2분정도 걸리는 짜릿한 체험을 통해 정말 지구가 하나의 촌락밖에 되지 않는다는 지구촌(global village) 개념을 실감하기도 했다. 영어로 기사 쓰는 법도 많이 배웠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전문(lead paragraph) 만드는 법을 본격적으로 체득한 것도 로이타 통신 시절이었다. 그 시절 빼놓을 수 추억은 이시호 지국장의 옥수동 집에서 멋진 음악을 배경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대기자의 면모를 옆에서 직접 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AP, UPI, 로이타, AFP 등 세계 주요 통신사에 근무하고 있는 후배기자들을 만나면 나의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곤 손이라도 한번 더 잡고 진심으로부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고달픈 생활이지만 기자로서 대성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통신사에서 근무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간첩으로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힘들게 일하던 로이타 통신시절이 나의 언론계 생활과 그 이후 PR인으로서의 생활을 한층 굳건히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51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973년 7월 10일. 그 다음날이 남북적십자 제7차 회담이 평양 보통강 려관 회의실에서 열리는 날이다. 나는 그때 코리아 헤럴드의 기자 신분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다.

당시 이범석 수석대표 방에 많은 기자들이 모였다. 우리의 전략, 현안 타결 가능성 등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자 이범석 수석대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갑자기 밖으로 나갔다. 자연 기자들도 그 뒤를 따르고, 그러면서 보통강 려관의 뒷뜰에까지 나갔다. 그랬더니 거기서 자세한 얘기를 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 수석대표의 방은 도청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기자들을 뒷뜰로 이끌어 자세한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적십자회담에 대해서는 기자들은 발표문을 중심으로 사실보도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남북한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함부로 추측해서 쓸 수도 없는 시대상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 “메모지 한 장 쓴 것까지 함부로 버리지 마시오”라고 얘기하던 이 수석이었다. “회담장에서 우리 남한측 사람들끼리 메모가 자주 왔다갔다 한다는데 그 메모지는 없앤다 하더라도 그 밑에 글자가 눌린 자국이 남는데 그것을 화학처리하면 모든 메모 내용을 다 재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략이 드러날 수도 있지요.” 매사에 세심한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발언이었다.

평양에서 이 수석이 평양에 둔 가족을 만나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나는 1,000만 이산 가족의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지 내 혼자의 슬픔을 해결하러 온 것은 아니다”고 하면서 큰 사람의 모습을 보이던 그 같은 인물은 사실 드물다.

외교클럽이나 한식당에서 기자들과 자주 어울려 아주 깊이있는 얘기를 나누지만 PR측면에서 보면 사소한 말실수로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자리에서 그는 한치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PR전문가가 아닐 수 없다. 해야 할 것(do's)와 해서는 안 될 것(don'ts)에 대해 철저한 인식을 갖고 있어 하지 않아야 될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는 오히려 기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특히 내가 그에 대해 인상깊은 부분이 있다. 보통 술자리에서 술 몇 잔을 주고받으면 해서는 안 될 얘기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범석 수석대표는 흐트러지기 쉬운 술자리에서조차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구분하였다. 그가 국가적으로 책임있는 자리에서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신뢰할 만한 자세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버마(미얀마)의 아웅산에서 참변을 당했을 때 그를 아끼던 많은 사람들이 ‘미인은 박명’이라며 가슴 아파했다.

덧붙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범석 수석대표을 보좌한 정주년 대변인은 정말 흔히들 말하는 ‘환상의 콤비(dream team)'였다. 정 대변인은 이 수석대표의 표정만 보고서도 저 양반이 지금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 대변인은 1973년 한창 신혼 초에도 기자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새벽 2-3시까지 술을 함께 하면서 기자들을 “그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그는 한번 만난 사람은 그의 진지함이나 성실함 또 인간적인 접근에 손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48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73년 7월 10일 제7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내게는 3박 4일간의 평양취재 기회가 주어졌다. 1973년 입사하여 아직 견습기자의 딱지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김용국 편집국장은 신문사내에서는 최장석 사회부장 다음으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되는 평양 취재를 보냈다.

그때 사회부 선배들이 들고 일어나 견습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기자를 어떻게 대표로 평양에 보낼 수 있느냐고 목소리 높여 항의했다. 그런데 편집국장은 오히려 ‘김 기자가 6개월 동안 쓴 기사 양이 아마 당신들 6년간 쓴 양은 되지 않겠느냐’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며, 김 기자가 적십자 출입 담당기자로 평양에 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호되게 선배들을 나무랐다는 후문을 들었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코리아헤럴드. 나는 보통 아침 7시에 회사에 출근한다. 혼자서 그 전날 취재한 보통 신문 전면의 1/4 내지 1/3 페이지 분량 정도의 기획기사를 하나 쓰면 오전 9시에서 9시 30분쯤 된다. 즉 2시간 먼저 나와서 기획특집기사(feature story)를 한 개씩 쓰면 일주일에 보통 2-3개의 기명기사(by Kim Kyong-Hae)로 기획기사가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출입하는 부처에서 나오는 스트레이트 뉴스(straight news) 기사는 매일 오후 마감시간까지 쓰면 되지만 부장이 항상 신경을 쓰는 것이 기획기사였다. 읽을거리가 되는 기획기사를 하나 써낼 때마다 부장의 입이 벌어지는 것은, 부장들도 이 기획기사에 대해 많은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서 2-3일 간격으로 하나씩 써내주니 정말 고마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용이 알차기에 편집국장조차도 대단히 흡족해하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게 주어진 3박4일간의 남북회담 취재 기회는 결코 요행이 아닌 나의 노력에 의해 얻은 것이다.

드디어 평양행 티겟을 받고 나서도, 서울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7월 9일 북한산에 올라가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심리적 준비까지를 끝내고, 7월 10일 아침 일찍이 하숙집을 떠나 평양행 버스를 타고 판문점에 도착했다. 에어콘은커녕 선풍기 바람조차 없었던 무더운 버스 속에서 약 세 시간을 시달리며 평양 보통강 려관에 도착.

그 후 잠시 동안의 자유시간이 있어 평양의 이발소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안내원에게 이발소 위치를 물었다. 지하1층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무턱대고 지하1층으로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데 아마도 기자의 호기심 같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지하1층에서 다시 이발소를 물어 결국 찾아간 곳에는 세 사람의 이발사가 세 개의 의자 앞에 서 있었다. “면도좀 합시다.” 사실 나는 아침에 서둘러 나오다 신촌 하숙집에서 면도도 제대로 못했었다. 그 중 한 명의 이발사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앉자마자 의자가 뒤로 제쳐지고 면도자세. 면도칼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꼈을 때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세계가 남북적십자회담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썼다. 이북 이발사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중 한 이발사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분명 예기치 못한 일을 상부에 보고하려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의 태연한 모습에 오히려 더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내게는 당황하지 않고 놀란 표정을 짓지 않는 습관이 몸에 익숙해져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놀라지 않을 배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자주 듣곤 한다. 이것이야말로 PR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위기상황에서는 “놀란 표정을 나타내지 말라(Don't display panic)"는 것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가 느긋하게 이발을 하던 그 삼십여 분 동안 같이 간 남한측 수행원들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여 이리저리 나를 찾아다니느라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30대 초반의 장가도 가지 않은 혈기왕성한 시절이여서 모험심과 호기심이 왕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평양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하며 혼자 눈을 감으며 낮의 이발소 상황을 떠올리는데 그제서야 식은땀이 나는 것이 아닌가.

서로 오고가는 대화가 있을 때, 즉 커뮤니케이션이 될 때 공포는 줄어드는 법인데 “면도 해달라”는 한 마디뿐 거의 30분 동안 언제 전쟁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남북관계 같은 차단이 일어났었던 것이다. 사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이북의 이발사들도 당황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것이 위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갑자기 남한의 젊은 기자 한 명이 나타나 면도를 해달라니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에 당황하지 않았었겠는가.

이처럼 기자라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새로운 정보를 찾아다니는 왕성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특종(scoop)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신변의 위협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기자로서의 한때 나의 남다른 경험은 PR인이 된 지금도 기자들에 대한 동료의식과 함께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어쩌면 기자로서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PR인으로서 그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47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추측하지 마라

2008년 03월 06일 16시 45분

위기발생시 세 가지 금기사항은, 첫째, 추측해서 얘기하지 말라 (Don't speculate), 둘째,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Don't remain silent when you should speak), 셋째, 당황환 표정은 짓지 말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얘기하라(Don't display panic)이다. .

이 중 특히 "추측하지 말라"는 부분은 몇 번이라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위기시 마감시간에 쫓기는 기자들에게 100% 확신이 가지도 않는데 "본인의 생각으로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가 알기로는......" 등으로 추측하여 얘기해서 마감시간에 쫓기는 기자들이 제대로 확인도 않고 기사를 쓴 후 그 추측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기자들로부터 원성을 듣게 된다. 결과적으로 오보를 쓴 셈이 되기에 기자들은 능력 없는 기자로 인식되고 상당한 정신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꼭 말할 수 있는 정보가 있으면 얘기하되 추측해서는 얘기하지 말라는 것이 비단 위기상황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잘 적용되는 원칙이다.

기자들은 항상 실명 기획기사의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의데스크로부터 항상 좋은 기획 기사를 쓰라는 압력을 받게 된다. 상당한 정신적인 압력을 받고 있는 경우 점심 때 어느 조직의 책임자로부터 들은 얘기가 떠오르고 기사거리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부장님, 기획기사 하나 쓰겠습니다"고 용기있게 얘기한 후 점심 때 들은 얘기를 종합해서 기사를 쓴다. 그 기자는 물론 점심을 같이 한 사람이 그 분야에 꽤 전문가이고 또 그 회사의 최고 책임자이기에 "제 생각으로는... ..."라고 전제해서 얘기했지만 그것은 겸손해서 그런 것이지 실제로는 그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 내용에 바탕을 둔 기사가 나왔을 때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판정되면 그 기자는 그 회사 내부에서 그리고 출입처에서 그리고 동료 기자들간에 능력 없는 기자로 낙인 찍히게 된다. 추측과 관련하여 즐겁지 못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기자들이 마감 시간에 쫓기고 있고 또 데스크들로부터 좋은 기획 기사를 쓰라고 압력을 항상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37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이제 위기가 한번 발생하면 회사의 존폐와 관계된다. 위기에 잘 대처하면 살아남고 대처 못하게 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경우 위기관리 전략이 전연 없었기에 지금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가장 발생가능성이 높은 유형의 위기에 대해 대비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위기진단(Crisis Audit)을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위기진단은 회사의 내부와 회사 밖의 경우로 나누어 실시해야 하며 회사내부에서 직접 하는 것과 회사 밖의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좀더 객관적인 잠재위기에 대한 자료를 얻는 방법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취합한 여러 가지 잠재위기를 큰 카테고리로 분리하여 5-10가지 정도의 위기를 상정하여 각 위기별 위기관리 전략을 수립한다.

각 위기단계별 대국민 설명, 대변인, 위기관리팀, 사과광고문안, 제3자뉴스원 등의 내용들이 위기관리 매뉴얼에 포함되게 된다. 최근 꽤 많은 기업들이 위기관리 매뉴얼 작성에 대해 문의하고 있어 우리 기업들도 본격적인 위기관리 준비태세에 돌입한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위기관리 매뉴얼(CMM)인데, 이러한 매뉴얼을 구비하고 있으면 실제 위기가 닥쳤을 때, 어떠한 잠재위기와 가장 유사한지 판단하여 실제적인 위기관리 대책을 신속하게 수립할 수가 있다. 이 경우, 매뉴얼에 포함된 몇 가지 내용만 현실에 맞게 수정하여 각 위기관리 팀들에 배포하게 되면 효과적인 위기관리가 가능하며 또한 한 목소리로 기업의 입장이 외부로 전달될 수 있게 된다.

또 위기진단을 통하여 잠재적 위기에 대한 자료를 취합, 분석하여 각 위기별 위기관리 지침을 쉽게 화면으로 설명하는 비디오를 제작한다. 전직원을 모아둔 자리에서 위기관리의 중요성을 설명한 후 하나하나의 위기에 대한 각 담당부서별 위기관리 역할 및 지침을 제시하는 비디오를 상영한다. 이런 전체 회의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면 실제 위기 발생시 전직원들이 당황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여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위기진단 후 완화(Mitigation) 작업을 해야 한다. 완화 작업은 홍수가 많이 나는 지역에서 미리 댐(dam)을 건설하거나 지진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에서 미리 고층건물을 짓지 않으면 사전에 위기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완화 작업까지는 어느 기업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위기 진단 작업 과정을 통해 말단 사원에서부터 중역까지 올라오면서 각자들이 보는 위기의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위기진단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또 한 단계 더 넘어서 완화작업까지 할 수 있다면 발생가능한 위기상황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될 수 있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36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위기와 관련하여 종종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카타르시스의 의미는 예를들어 친한 친구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었다는 비보에 접했을 때 여러 가지 동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친구의 처지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 기업의 경쟁사가 현재 큰 위기에 부딪혔을 때 자사가 그런 불행한 처지를 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카타르시스만 맛보는 최고경영층이나 고위층 인사들이 있다면, 그들은 기업을 경영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직무유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경우 위기관리 능력이 있는 경영자라면 경쟁사의 위기상황으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어 자사의 기업경영에 유익한 교훈들을 이끌어 내고 또 자사의 위기관리전략이 제대로 수립되어 있는지 확인, 검토해야 할 것이다. 타산지석이란 옛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기업, 조직이나 개인들이 위기(Crisis)에 처했을 때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카타르시스만 맛볼 것이 아니고 항상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대응하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어떤 분야에서 선두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던 기업이 위기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후발 자에게 선두자리를 내어주고 사양의 길을 걷게 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한번은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한 미국인 사업가가 "Are you from R.O.T.C.?"라고 질문해 R.O.T.C.가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Republic of Total Crisis" 즉, "총체적 위기 공화국"이라는 얘기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전직 대통령들이 감옥에 가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감옥에 가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있고 난후 3C라는 말도 나왔다. 즉 Crisis, Corruption and Comedy라는 것이다. 이 큰 사건이 일어나고 부패(corruption)가 만연해서 온통 코미디(comedy) 자체라는 것이다. 이제 위기관리에 대한 사전대응에 더욱 관심을 갖고 위기관리 전략 수립에 나서야 할 때이다. 특히 21세기를 위기관리의 시대라고들 한다. 위기관리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국가, 개인, 기업은 21세기에는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위기상황에서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본다. 내가 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출입할 때 일이다. 현대그룹 명예회장인 정주영 회장에게 한 출입 기자가 "정회장님, 회장님은 언제 뵈어도 검소하시고 절약하고 있는데 아드님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물었다. 이에 정회장은 "나도 인정하오. 그러나 나는 가난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으나 그 놈들은 돈 있는 아버지를 뒀으니 다를 수밖에 없지 않소." 라고 답하며, 어려운 국면을 재치있게 넘어갔다. 정주영 회장의 위기상황에서의 지혜로운 대응능력에 많은 기자들이 그를 좋아하고 또 인간적으로도 존경했다. 또 김대중 대통령이 전 김영삼 대통령과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배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었지만, 그 이후 다시 대통령 출마를 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김 대통령은 변명으로 일관하기보다는 마음을 바꾼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정면 돌파했다. 언론과 국민은 한번은 속을 수 있겠지만 두 번은 속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간파하고 솔직하게 대응한 것이다. 휼륭한 위기관리자의 면모와 함께 탁월한 지도자고서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위기상황에서는 다른 명분으로 일관하기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정면 돌파하는 지도자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나 기업은 물론 개인에게도 돌발할 수 있는 위기상황을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타인의 또는 타사의 위기상황에서 카타르시스만 느끼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35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기업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위기의 유형은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즉 항공기 불시착과 같이 발생가능한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언제, 어떻게, 어디서 발생할지 예측이 어려운 유형의 위기상황(Known Unknowns)과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과 같이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위기상황(Unknown Unknowns) 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유형별 위기에 대한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Known Unknowns"는 위기진단(crisis audit)을 통해 작업을 하게 되면 상당부분까지 미리 알 수 있게 된다.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기 중 ”완화(mitigation)"작업을 하게 되면 잠재적인 위기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Unknown Unknowns"에 대해서는 사전대비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Known Unknowns"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준비가 가능하다.

지난 1977년 발생한 이리역 화약폭발 사고시 한국화약은 두 번의 사과문을 지면을 통해 언론에 게재했다. 첫번째 사과광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77년 11월 11일 밤 이리역에서 일어난 화약폭발로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드린데 대해 우선 지상을 통하여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이 사고로 불의의 참변을 당하신 사망자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사망자의 유가족과 부상자 및 그의 가족 여러분과 이리 시민 여러분에게 무어라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황급한 마음으로 우선 지상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에게 무어라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황급한 마음으로 우선 지상을 통하여 국민 여러분들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1977년 11월 12일

한국화약주식회사

 

이 정도의 사과문으로 해결될 사고는 처음부터 아니었다. 언론은 연일 한국화약이 져야 할 참사의 책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질타했다. 3일 후 한국화약은 다음과 같은 제2차 사과문을 게재했다.

 

“ 거반 지상을 통하여 경황 중에 사과 드린 바 있습니다만, 이번 이리역 폭발사고로 국민 여러분에게 큰 충격과 경악을 불러 일으킨데 대해 우선 머리 숙여 사죄하오며 특히 사고 직후 신속한 복구대책에 힘써주신 정부당국, 각 기관, 그리고 재난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복구에 전념하고 계신 이리 시민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본인은 이번 사고에 대하여 법적, 도의적 책임뿐 아니라 모든 사력을 총 동원하여 앞으로 중앙 재해 대책 본부와 더욱 긴밀한 협조하에 조속한 피해 복구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거듭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1977년 11월 16일

한국화약주식회사

회장 김종희 근배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사고발생 80시간이 지나서야 임직원이 아닌 회장의 이름으로사과문이 발표됐고 조속한 피해 복구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큰 위기에 봉착한 기업의 경영진과 홍보실 직원 등은 위기사건 발생시 당황하여 사과문을 꼼꼼하게 작성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봉착할 수 있는 위기와 관련하여 사안별로 사과문을 미리 작성해 두는 준비가 필요하다. 사소한 사안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실제 위기상황에서는 간단한 해명서나 사과문을 작성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사전에 유형별로 광고 문안을 작성해 두고 실제 상황에서는 상황에 맞게 문구를 약간 고쳐서 사건발생 즉시 주요 언론에 광고가 게재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34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김사장님, 어떤 신문에 저희 회사와 제품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게재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전화선을 통해 듣게 되는 이러한 고객의 다급한 목소리는 이제 나에겐 전혀 생소하질 않다. 왜냐하면 지난 10여 년 넘게 많은 외국 기업 및 관청의 PR업무를 대행하는 PR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장 많이 받게 되는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질문인 까닭이다.

이 경우 통상 나는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회사 차원에서 준비하고 있는 일이나 그 언론사에 근무하는 사람 중에 평소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 혹 있으십니까?"라고 상대방에게 되묻는다. 그러면 대부분 "한국의 언론 상황을 잘 몰라서 대비책을 세워두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언론인과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여 친숙한 사람이 전혀 없으며, 부정적인 기사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면 더 큰 손해를 입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는 주변의 충고도 있고 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못하고 있다 "는 답변을 주로 듣고서 놀라곤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이 답변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언론이 과거와는 매우 다르며, 급격히 변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도 이러한 생각으로 언론 대응을 계속한다면 그 기업은 한국에서 성공적인 사업을 영위하기가 점점 힘들어 질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앞서가기는커녕 점점 뒤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우리의 속담을 들려주면서 사전대응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충고를 평소 아끼지 않는다.

일이 터진 후 이를 수습하려 하면 더 큰 물질적 손해와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될 뿐 아니라 이의 만회를 위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잘 계획된 사전 대응은 적은 비용을 들여 예상치 못한 큰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사전 대응이란 예방단계를 의미하며, 여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우선 자신의 기업체나 업계에 출입하는 젊은 기자부터 한번 만나보라. 기자들은 어느 나라에서나 거의 마찬가지지만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자가 상대방에게 일단 믿음을 갖게 되면 유익한 대화가 가능하고 밀한 관계로 쉽게 발전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데 유용한 좋은 정보들과 조언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일단 기자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게 되면 실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러모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평소에 우리 분야를 출입하는 기자들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각 언론사들은 기사 실명제를 채택하고 있다. 평소 기사를 한 줄 읽더라도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고 읽는다면 별로 큰 수고 없이 안면도 없는 기자와의 접촉을 수월하게 진행시킬 수가 있다. 자신이 읽은 기사 중에 큰 감동을 받거나, 평소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를 취재, 보도한 기사가 있을 경우 그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정말 시의적절한 좋은 기사였다'는 코멘트를 전달하거나, '독자로서 알고 싶었던 부분이었는데 보도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정도의 간단한 인사말로도 기자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또한 상대방에게 관심을 쏟게 된다. 만약 그 기자가 취재 중이어서 부재 중이라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간단한 서신을 작성, 발송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화나 편지로 자신의 기사에 관심과 사랑을 보내는 독자를 기자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되며 기회가 주어질 때 쉽게 친해질 수 있다.

그리고 언론사의 인사란을 주의 깊게 읽고 승진, 혹은 부서의 이동이 있을 때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기자의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 항상 따뜻한 관심을 표명하는 것도 언론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지방의 시설물 탐방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떠나는 것도 효과적이다. 그리고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서 경관이 뛰어난 지역이나 관광휴양지를 선택하여 어떤 분야의 최고 전문가와 직원들이 함께 하는 세미나나 워크숍 등에 기자를 초청하여 토론과 취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좋다. 이 경우 정보를 제공해주면서도 레크레이션, 등산, 골프 등의 여흥을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기자들과 쉽게 친해질 수가 있다. 한국에서는 "상대방과 깊이 사귀고 싶다면 함께 여행을 하라"는 말도 있다.

이밖에도 기자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것도 쉽게 기자와 사귈 수 있는 한 방법이다. 기자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는 것은 자신의 생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숨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상대방도 진솔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기대치 못한 의외의 새로운 정보나 자신의 사업분야에 대한 조언까지 얻을 수 있다. 또한 초대된 기자에게 자신의 사업분야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여 업계의 믿을 수 있는 정보통의 하나로 인정받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나는 한국의 여러 취재기자를 비롯해 담당부장들과 가깝게 지내는 몇몇 외교관과 사업가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들로부터 기자들과 친숙하게 지냄으로써 유용한 정보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기자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거나 등산, 골프, 스키 등을 타면서 서로 친해질 수 있었으며 이렇게 친분을 돈독히 함으로써 많은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을 듣곤 한다. 더 나아가 기자들과 친숙해짐으로써 저명한 인사나 그들의 동료를 소개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언론인들은 급격히 변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으며, 그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약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언론인과 친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기자와 친구로 오래 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많다. 언론인과 친숙하면 할수록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개인적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부정적인 기사가 나가고 난 이후에는 이미 늦다. 미리 기자들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해두는 것도 사전대응의 한 방법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33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예방접종을 하라

2008년 03월 06일 16시 40분

어느 조직이나 예상치 않은 위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위기의 가능성을 숨기기보다는 언론이나 공중, 정부 관련자들에게 우리 조직이 안고 있는 위기의 가능성에 대해서 사전에 들춰내서 얘기해주고 그 가능성에 대해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를 자주자주 얘기해 주는 것이 좋다는 것이 PR의 예방접종이론(Innoculation Theory)이다. 평소에 예방접종을 맞게 되면 항체가 생겨 세균의 감염을 막을 수 있다는 데서 근거한 이론이다.

조직과 관련되는 공중이 평소에 발생 가능한 위기들에 대해 얘기를 들은 바가 있으면 항체가 투입된 것이나 다름없다. 위기 발생에 관한 얘기를 듣고 의외로 생각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저 기업은 평소에 상 당부분 잘 준비해 왔기에 위기 극복을 잘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흔히 위기관리라고 하면 위기가 발생한 후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나 실제는 사전대응적(proactive)인 것이다. 위기가 발생 후의 관리를 위기 대응 또는 위기 대처라고 할 수 있으며 위기는 사전에 대응책이 수립될 때 효과가 있는 것이며 사건 발생 후의 수습 방안은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것이다.

위기의 가능성의 대해서 밖으로 문제를 꺼내어 과감하게 정면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지 음성적으로 숨기고 해서 위기가 피해가 주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이 예상치 않은 사건에 대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보험료를 지불하고 있으면서 과연 얼마만큼 위기에 대비하여 사전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겠다.

예방접종이론은 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평소에 개인이나 가정에 올 수 있는 위기를 미리미리 점검해서 식구들이 같이 상의도 해보고 좋은 방안도 함께 연구해 두면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당황치 않게 되고 차분히 전략을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랙백 보낼 주소 :: http://kimkyonghae.com/tt/trackback/132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의 김경해입니다. 큰생각과 큰PR을 위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by 김경해

카테고리

전체 (267)
CEO Thinks (5)
큰생각 큰PR (58)
Let's PR (65)
위기를 극복하는 회사 위기.. (61)
생생한 PR현장 이야기 (68)
Total : 58009
Today : 16 Yesterday :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