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현장 24시는 항상 긴장감이 고조된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PR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저자와 친하게 지내온 홍콩의 한 PR회사의 대표가 “삼호의 조봉구씨를 아느냐? 조봉구씨가 김대중 정부를 통해 과거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데 법적인 일과 대미관계는 미국에서 담당할텐데 한국의 언론에 그 실상을 알리는 일을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아파트붐 초기 방배동의 삼호 아파트를 지었고 중동진출을 하여 삼호의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다가 어느날 갑자기 소리없이 사라진 삼호건설의 창업자 조봉구씨! 1997년의 어느 봄날 아침, 시중에서는 조봉구씨가 사라진 것을 하나의 미스테리로 여기고 있었고 저자도 언론인으로서 의문투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참에 조봉구씨 사건을 접한다는 호기심반, 평소 저자의 회사에 꽤 많은 비즈니스를 연결시켜줬고 오랜 기간 사귄 친분 반으로 그의 부탁을 수락하고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봉구씨는 서울 강남에 부동산 개발붐이 한창이던 70년대 무렵, 부동산 업계에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테헤란로 주변의 역삼동, 도곡동, 방배동 일대에 수백만평의 땅을 소유하였고, 강남 일대는 물론, 제주도 땅까지 근 백만 평이나 소유하고 있어 한국 최고의 부동산 재벌로 뽑혔으며, 그가 살던 방배동 집은 국내 재산세 1위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74년 건설업체 삼호를 설립하였으며, 강남 일대에 자신의 땅에 1천 세대 이상의 대규모 아파트를 지었다.




저자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여러 사정들을 밝힐 자료도 없을뿐더러 그런 의도도 없다. 다만 5공 군사정권 때 일이기에 입도 뻥긋하지 못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이제 때가 되었다고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문제를 ‘정의’(justice)차원에서 규명하고 조봉구씨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고 나선 사람은 미 국무성의 고위 공무원 제프 씨브라이트(Jeff Seabright)씨, 그는 조봉구씨의 딸 조영애씨의 남편이었다. 로스앤젤리스에 있는 씨브라이트씨의 법대 동창이 운영하는 대형 법률회사에서 LA카운티 수피리어 코트에 대림건설등을 상대로 20억 달러 상당의 재산 반환 청구에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을 요약하면 삼호 건설의 조봉구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을 하자마자 삼호는 부실기업 정리 대상에 올라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1984년에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그의 동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죽은 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던 그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가슴에 묻어둔 할말을 하고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는 로스앤젤리스와 워싱톤의 한국 특파원들과의 기자회견에서 삼호가 부실기업이었다면 주거래 은행에서 부도를 내고 기업주를 구속하는 게 정상적인 절차인데, 이런 절차도 밟지 않고 하루아침에 삼호를 타 기업에 넘긴 것은 위법이라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다고 밝혔다. 삼호가 합병한 것은 예정된 각본에 따른 것으로, 은행을 통해 삼호에 자금압박을 가한 뒤 강제로 위임장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자는 월간조선의 한 탐사기자가 로스엔젤리스에서 조봉구씨를 만나 인터뷰하는 것을 주선하였다. 그 기자는 취재 후 아주 긴 원고를 작성하였으나 어찌된 사연인지 월간조선에 기사가 게재되지 않았다. 다시 시사저널의 기자를 접촉하여 저자회사의 부사장과 같이 로스엔젤리스의 조봉구씨를 인터뷰하였다. 그 결과 3페이지에 달하는 심층보도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1984년에 일어날 일들을 13년이 지난 시점에 문제제기는 언론의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로스엔젤리스에서 조봉구씨를 만난 두기자에 의하면 조봉구씨는 정말 어렵게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겨우 17평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주는 연금을 받아서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정은 시사 저널과 로스앤젤레스 특파원들이  인터뷰한 내용으로 신문에 기사화 되면서 그의 억울했던 과거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저자의 관심은 그 사건 자체보다는 조봉구씨의 기막힌 인생역정이 더 큰 관심사였다. 한국최고의 갑부였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서 미국 정부의 연금을 받으면서 17평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면 아마 자살을 생각 할 수도 있지 않았을 까 생각해봤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여 생활하는 법을 잘 터득한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두 한국 기자들의 로스앤젤리스 방문 후 저자는 조봉구씨의 사위인 씨브라이트와 딸 조영애씨를 만나기 위해 워싱톤을 방문하였으며 그때 조봉구씨도 워싱턴으로 오게되어 조봉구씨를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모습이 변했고 그 기막힌 인생역정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 까하는 호기심으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차분히 과거 얘기도 하면서 긴박했던 1984년을 털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분명 악에 북받친 사람이 아니고 편안한 마음으로 큰 용광로에 증오와 분노를 녹이면서 그 기막힌 사연을 남의 얘기처럼 얘기하였다. 그에 비하면 그의 사위인 씨브라이트씨는 정의(justice)는 살아있다고 강조하면서 장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조봉구씨는 처음 딸이 미국인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별로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미국인 사위가 한 노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앞에 나서게 된 지금 저 노인의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R인이 과연 이런 일에도 개입되어야 하는가? 이일을 맡으면서 PR인의 서비스 범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고객이 정당한 주장을 할 때 그 ‘진실’을 밝히는 작업에 PR은 분명 그 역할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하게 되었다. 약 6개월 동안 이 사건과 관련 PR업무를 하였고 그 이후는 예산상의 문제로 로스엔젤리스에 있는 법률 회사가 소송을 진행하고 저자의 회사는 손을 떼게 되었다. 이 법률 회사도 소송에서 이기는 경우에 ‘성공불’(success fee)을 받는 조건이었다고 하였다. 그 이후 소송이 어떻게 결론났는지 정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 조봉구씨와 몇시간을 지내면서 저자가 느낀 생각은 또 다른데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후의 조봉구씨. 그는 불운하였지만 현재 불행하지 않고 오히려 더 높은 행복지수를 누리고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재벌로서 매일 무거운 짐 속에서 편안한 날이 없는 ‘무거운 짐 진자’의 생활을 보내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새로운 삶은 사는 조봉구씨. 얼굴모습에서 분명 그는 다 잃어 버린자가 아니었고 많은 것을 얻은 자의 모습이었다.




지금 조봉구씨는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살아있다면 84세의 노인으로 미국 정부의 연금을 받으면서 작은 아파트에서 과거를 잊고 조용히 인생을 관조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최고의 “행복지수”를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조사를 보니 행복 지수는 GNP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질적으론 가난하지만 정신적인 만족감이 큰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1위, 필리핀이 세계 5위, 대한민국이 24위 미국과 일본이 훨씬 뒤에 있다고 한다. 지금도 아마 17평 아파트 주위를 바쁘게 산책하고 있다면 그의  행복지수는 상당히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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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의 김경해입니다. 큰생각과 큰PR을 위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by 김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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