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기네스(Guinness)맥주, 1955년 레버(Lever)사의 도브(Dove)비누, 1960년 롤스로이스 자동차와 쉘 정유사, 1962년 시어스(Sears)백화점, 1971년 메릴린치, 1975년 영국관광청, 1987년 허쉬(Hershey)초콜릿, 1996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1997년 이코노미스트 잡지, 1998년 코닥 필름, IBM 및 포드 자동차 위의 고객들은 광고대행사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최상급 광조주들이다. 마흔살이 되어 뒤늦게 광고회사를 차린 광고계의 전설적인 인물 오길비 앤 마더의 설립자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 1911-1997)가 영입한 감동적인 고객 리스트의 일부이다.

 

오길비가 불혹의 나이에 ‘오길비 앤 마더’라는 광고회사를 설립하였을 때 그 회사는 무려 3천개의 대행사와 경쟁을 해야하였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는 마케팅 PR 즉 MPR의 귀재였다. 전설적인 광고인, 광고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할만한 광고인을 꼽으라면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는 광고인 오길비. 그가 MPR의 귀재라니 놀라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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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비의 MPR전략의 시초는 아주 작은 일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우선 무명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초의 작업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첫 번째로 광고업계지 기자10명 정도를 점심식사에 초대하였다. 그는 無로부터 큰 대행사를 만들려는 그의 야심을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그 후 그들은 오길비가 보내는 자료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기사로 다루어 주어 그의 이름은 빠르게 전 광고인과 광고주들에게 각인 될 수 있었다.”

 

오길비의 발언은 무엇이라도 당시 서울의 충무로에 비교되는 뉴욕의 메디슨가의 위대한 기라성들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졌다. 그것 중에 하나는 아트 디렉터즈 클럽에서 그가 한 말이다. 청중인 아트 디렉터 전원에게 좋은 레이아웃을 만드는데 39개의 원칙이 적힌 리스트를 나누어주었는데 그때의 고전적인 원칙은 오늘날 메디슨가에서도 통용되고 있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하나의 ‘바이블’ 이 되었다.

 

그 다음은 대학에서의 광고 관련 강의의 몽매함을 고발하고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자격증을 수여하는 광고대학을 만들기 위해 1만 달러를 내놓을 것을 제안하는 그의 발언이었다. “이 바보 같은 제안은 신문의 1면을 장식하였다.”고 오길비는 회상하였다. 뉴스매체의 특성을 이해하고 기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가를 파악한 제안이었다.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예상 고객 600명에 대해 광고업무관련 뉴스레터를 정기적으로 송부하였으며, 이 자료는 많은 광고주들에게 읽히게 되어 고객개발에 큰 힘이 되었다. “나의 이러한 자기 PR법이 지나쳤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내가 점잖았다면 지금과 같은 성과를 거두는데 아마 20년이나 걸렸을 지도 모릅니다. 나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무명이었기 때문에 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고 어려운 옛시절을 오길비는 회고한다.

 

그는 오길비 앤 마더를 마케팅하여 새로운 광고주를 끌어들이고 회사를 키우는데 이처럼 PR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는 PR의 힘을 알며, PR을 하기 위해 언론 매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가를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그는 또 책의 위력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그가 쓴 몇 권의 책들도 아마 이러한 PR 작전의 일환으로 출판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책은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는 광고의 마술사라는 언론 특유의 자극적 표현으로 『타임』지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그가 고객을 영입하는데 있어서의 기본 철학은 언론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그와 오길비 앤 마더의 주가는 계속 상승하였다. 그의 MPR전략이 빛을 발하게 되어 그의 사업은 더욱 더 번창하게 되었다.

 

그는 대행이 끊기면 경영에 곤란을 느낄 것 같은 큰 클라이언트에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혹시나 그 클라이언트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 까 전전 긍긍하면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포드의 승용차인 에드셀(Edsel)의 프리젠테이션을 포기했다. 그는 포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귀사의 어카운트는 현재 우리회사의 취급고의 반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당신들에게 솔직한 조언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부담입니다." 라고 쓴 그의 편지는 또다시 언론의 화제가 되었다.

“나는 클라이언트를 선택하는데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나의 이상(理想)은 2년에 1개 사씩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확보해 나가는 것이다 너무나 성장이 빠르면 우리들은 수련이 부족한 직원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새로운 클라이언트의 캠페인 제 1탄을 위해 우리들이 지닌 최고 직원을 동원함으로 말미암아 종전의 클라이언트에 대한 서비스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기준으로 클라이언트를 구하였으며 이 원칙은 또다시 언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는다.

 

1) 그 회사의 제품이 우리들이 광고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여러 번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우리가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제품을 취급하여 실패한 경험이 있다.

변호사는 자기로서는 유죄임을 알고 있는 살인범에 대해서도 변호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광고란 직업의식만으로 할 수 없다.

2) 우리가 맡기 이전에 일을 했던 대행사 보다 일을 더 잘할 자신이 없으면 절대로 맡지 않는다. 뉴욕 타임스가 그에게 광고를 맡아 주도록 요청했을 때 그는 거절했다. 뉴욕 타임스가 지금까지 해온 빛나는 광고보다 더 잘할 자신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3) 장기간에 걸쳐 매출이 감소되고 있는 제품은 피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는 대부분 그 제품이 본질적으로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련한 외과의 같으면 환자를 수술대 위에서 죽게 해도 최선을 다했다면 비판의 대상은 되지 않지만 젊은 외과의가 그런 재난을 만나면 일생에 큰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4) 클라이언트가 우리에게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살핀다.

그는 클라이언트를 백만장자로 만들기 위해 그 자신은 빈털터리가 될 만큼 희생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클라이언트에 대한 지나친 서비스로 문을 닫게 되든가 아니면 서비스 부족으로 그 고객을 잃게 되든가 그 균형을 유지하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5) 큰 이익은 주지 못해도 훌륭한 광고를 만들게 해주는 고객을 택한다.

기네스 맥주나 롤스로이스처럼 큰 이익은 주지 못했어도 좋은 광고를 만들게 해서 우리들에게 황금의 기회를 주게 한 광고주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대행사의 존재를 광고하는데 이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위험한 것은 소규모의 대행사가 크리에이티브에는 능하지만은 조사나 마케팅에는 약할 것이라는 억측을 받기 쉬운 점이다.

오길비 자신도 좋은 카피라이터로 인정은 받았지만, 타 부분은 인정받지 못해서 그것을 원통스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전문은 카피보다는 오히려 조사였다. 그는 갤럽 박사의 여론조사연구소 출신이었다.

6) 클라이언트의 경영자와 대행사와의 관계는 환자와 주치의의 사이와 같이 친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카운트를 맡기 전에 그 클라이언트와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타진해 봐야 한다. 그러므로 예정 클라이언트가 처음 나를 만나기 위해 오면 그가 왜 대행사를 바꾸려고 하는가를 나는 잘 알아본다. 변덕스런 고객을 얻는 것은 얻지 않는 것만 못하다.

 

7) 그는 광고가 마케팅믹스(Marketing Mix) 중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경시하는 클라이언트를 피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현금이 필요하게 되면 광고비로 책정해 놓은 것에 손을 대는 나쁜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대행사에게 대체로 가장 유리한 어카운트는 단가가 싸지만 널리 일반에게 사용되는 소비제로 빈번하게 구매되는 상품이다.

고가의 내구 소비재보다는 이 일반 소비재야말로 보다 많은 예산과 광고테스트를 위한 많은 기회가 있는 것이다.

 

8) 오길비는 연구소에서 생산되는 신제품이 아니면 신제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 신제품이 아니면 이미 타사에서 전국적으로 판매되고 있는 제품들이다.

신제품은 테스트 마켓에서 10중 8까지 사멸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9) 만약 우수한 캠페인을 만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결코 협회나 연맹과 같은 연합된 클라이언트의 광고를 맡아서는 안된다.

그는 어떤 대행사와 레이욘 회사 연맹이라는 어카운트를 얻기 위해 경합한 일이 있었다. 그 연맹의 수뇌들은 그를 거대한 회의실로 초대한 다음, "오길비 씨, 우리들은 많은 대행사를 만나고 있습니다.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15분간입니다. 시간이 되면 이 벨을 울리겠습니다. 벨을 울리면 다른 대행사가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는 그 고객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들이 캠페인해야 할 제품은 몇 개입니까?"

답은… 자동차 타이어, 가구재료, 산업용재, 여성의복, 남성의복.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답은… 60만불.

"광고의 OK는 몇 사람이 해야 합니까?"

답은… 12명의 위원과 12개 회사의 대표들.

"벨을 눌러 주십시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도 많은 주인, 너무나도 많은 목적, 너무나도 적은 금액을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10) 때로는 그들이 광고를 운영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고용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부로 광고를 맡기겠다는 클라이언트는 사양하였다.

그는 그의 조건에 맞지 않는 어카운트를 거절한 일이 5, 6회 있었다.

저 유명한 스위스의 시계회사에서 그에게 광고를 맡기겠다는 것을 그는 거절했다.

그 이유는 그 광고가 스위스에 있는 수뇌진의 승인이 필요할 뿐 아니라 미국 수입업자의 OK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주인에게 시중을 든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어카운트를 거절할 때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수수료를 25% 낼 수 있으면 맡겠다고 제의하자 그 쪽에서 거절해왔다. 새로운 대행사를 물색하고 있는 회사가 후보에 올라있는 대행사의 명단을 신문에 공개하는 일이 있다. 이럴 때 그는 그 경합에서 물러난다.

만약 탈락했을 때 그것이 알려지면 그의 회사의 위신을 위해 매우 불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흔히 대행사에서 예정 클라이언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대행사의 사장은 부하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 부하가 프레젠테이션을 하게 되지만 그는 언제나 그 자신이 프레젠테이션을 하였다.

 

대행사의 선택을 최후로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클라이언트의 사장이다.

대장을 설득하는 것은 대장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경험이 많은 어카운트는 인간 전람회에 절대로 속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많은 대행사 리더의 솔로에 더 많은 신뢰를 주고 있다." 오길비의 경험담이다.

 

1949년 뉴욕 메디슨가에 오길비 앤 마더사를 창립하였다. 그 후 그는 매우 독창적인 광고들을 선보였고 창의성과 여론조사를 통한 광고도입, 기업 이미지 광고(브랜드 광고)의 중요성을 알려 현대 광고를 발전 시켰다.

 

‘MPR, 광고 보다 강한 PR'의 저자 정해동․박기철씨는 오길비가 가장 존경받고 가장 사업적으로 성공하게 된 배경을 4가지고로 설명하면서 그의 MPR기법을 오길비가 있게 된 결정적 이유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오길비는 광고를 제대로 안 사람이었다. 되지도 않는 크리에이티브로 허풍떨기 쉬운 메디슨가의 광고 바닥에서 그는 광고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효과가 있는지 알고 그것을 자기 일에 철저히 적용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크리에이티브란 끔찍한 말이라며 자기 회사 직원들이 함부로 사용하지 말도록 했다. 그가 말한 브랜드 이미지가 광고란 흔히 생각되는 감성적으로 뽀시시한 소프트 광고가 아니라 지속적 ․ 일관적으로 동일한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광고다.

 

둘째로 오길비는 올바른 광고 대행사 경영의 모범을 보여준 사람이다. 광고 대행사가 어떻게 일해야 하며 어떤 마케팅을 하고 어떤 직원교육을 해야 할지 그는 정확한 맥을 짚고 회사를 성장 ․ 발전시켰다. 이걸 실감하려면 그의 책에 담긴 광고 대행사 경영과 관계된 통찰을 육안(肉眼)이 아닌 지안(智眼)으로 읽어야 한다. 육안으로는 활자만 보이지 그의 통찰력이 절대 안 보인다.

 

셋째로 오길비는 광고뿐만이 아니라 통합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MC)의 선구자였다. 그는 브랜드 이미지 광고의 창시자라기 보다는 데이터베이스 마케팅을 바탕으로 하는 IMC의 선구자였다. 오길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세대를 살았던 광고인 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유일하게 소비자로부터 직접적인 행동 반응을 얻는 일의 중요성과 가치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넷째로 오길비는 PR의 귀재였다. 그것도 MPR의 귀재였다. 이게 ‘오길비’가 된 결정적 이유이다. 오길비 앤 마더 광고 대행사는 1992년 세계광고대행사 중 매출 7위를 기록하였다. 오길비는 1911년에 태어나 몹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힙겹게 에딘버러에 있는 학교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였다. 대학졸업뒤 대공항으로 수습요리사와 난로 외판원등을 하면서 어렵게 보내다 마티앤 크로더 광고대행사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영국정보부와 영국대사관직원으로 일한 경험도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헤더웨이(Hathaway)셔츠 광고를 기억하고 있다. 116년 된 헤더웨이 의류회사에게 순식간에 매출이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당시 1950년대 미국에서 대량 생산, 유통되던 와이셔츠 시장에 헤더웨이만의 맞춤화를 브랜드 컨셉으로 내세우고, 광고에서는 에꾸눈을 한 모델을 써 사람들에게 뭔가 있어 보일 것 같은 감성적 호기심을 자주 하여 소비증대에 한 몫을 하였다.

 

그의 롤스로이스 광고의 카피는 더욱 더 유명하다.

‘시속 60마일에서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소음은 전자시계소리’(At 60miles an hour the loudest noise in the new Rolls-Royce comes from the electric clock) 항상 그 스스로 앞장서서 전략을 개발하고 미디어에 과감하게 노출시켜 자신과 자신의 회사를 MPR기법을 동원하여 마케팅하여 사업면에서 가장 성공한 광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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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즈 코리아의 김경해입니다. 큰생각과 큰PR을 위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by 김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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